[ 부스개꽃 피는 서계마을 ] 시조 읊는 안광영 할아버지 망향의 슬픔 , 옛 노래로 풀어내 환갑 넘어 시작해 국창부 합격 “ 소양 쌓으며 건강도 챙겨 ” 동장군이 잠시 물러간 1 월 어느 날 .
마을 어르신들을 길목에서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조에 조예가 깊은 분이 계시다는 첩보 (!) 를 듣게 되었고 마침 외출했다 마을로 돌아온 안광영 (81)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
대한시조협회는 전국적으로 170 여개가 있다는데 안 할아버지는 그 중 한국전통예악총연합회 완주군 봉동지회에 소속되어 있다 . 마을회관에 앉아 그의 삶에 엮인 시조 이야기를 들었다 . 할아버지의 고향은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이다 . 그러나 이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
용담댐 건설로 수몰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 당시 어르신은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슬픔과 새로운 터를 잡아야한다는 걱정이 컸는데 안씨 시제에서 만난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 “ 여기가 밀양 박씨촌이여 . 80% 가 밀양박씨들이여 .
시방 나 사는 집이 밀양 박씨가 6 대를 살았는디 . 안갑준씨가 가보자고 하더니 기와집이더만 . 다 찌그러졌어 . 그걸 내가 뜯어내고 지었어 .” 할아버지가 시조를 접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시제에서 고등학교 교장이던 안성호씨가 축문을 읽는 안 할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
“ 진안군에는 전씨 다음으로 안씨가 많어 . 집안 어르신이 나를 인간문화재 박인수 선생님이 가르치는 시조 회관으로 데리고 갔어 . 내 시조 인생이 시작된 거지 .” 할아버지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조 “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느냐 . 우리도 그치지 마라 .
만고산청하리라 ” 를 한 수 읊어주셨다 . 할아버지는 당시 환갑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3 개월 동안의 피나는 연습을 통해 전남 구례 지리산 기슭에서 열린 남명 조식 선생의 탄신일을 기리는 전국남여시조경창대회에 참여했다 .
이 대회에서 4 등 , 시작한지 9 개월 만에 부여에서 열린 대회에서 1 등 , 그 후 산청에서 평시조를 통과했다 . 그리고 시조를 배운지 만 2 년 만에 서울 중구청에서 열린 본부대회에서 사설시조에 , 서산에서 지름시조에 합격했다 . “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국창부여 .
시조 배우기에서 대학으로 비견할 수 있는 국창부를 ‘ 유관순열사 탄신 102 주년 기념 시조경창대회 ’ 에서 통과했어 . 2001 년 1 월 1 일에 시작해서 나이 육십 넘은 나이에 만 3 년 6 개월 만에 국창부를 합격한 거지 .
그 이후에 대회장과 심사위원도 했어 .”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시조의 매력은 무엇일까 ? “ 소리를 쫘아아악 빼니까 심폐기능이 좋아져 . 그런 것도 있고 말하자면 소양이 되잖아 . 뛰는 것이 아니여 . 이렇게 따악 정좌로 앉아서 고개도 흔들면 안 돼 .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손짓도 안 하고 .
한 번 해볼게 .” 가볍게 평시조를 읊었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는 매우 바른 자세로 진지하게 시조를 읊어주셨다 . 할아버지의 시조 시연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전통이 단절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 “ 옛날에는 많이 했대 . 왜 시조가 성행했냐하면 일본 놈들한테 36 년간 압박을 받았잖아 .
해방이 되니까 막 그걸 부르는 거야 . 부랴부랴 동네마다 시조 못하는 사람이 없었어 ”. 할아버지가 서계마을에 올 당시에도 동네에 시조를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이제는 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 그는 시조가 계속 전승될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전해지길 바라는 소망을 내보이셨다 . / 임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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