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너머 위봉마을] 고향 지키는 허윤석 이장 사랑하면 보이는 것들 마을역사 , 전설 해박한 척척박사 “ 언젠가 마을내력 다 기록해 놓을 것 ” “ 위봉산성은 조선시대 때 유사시 전주성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을 모실 목적으로 세운 피란터야 . 방어용 . 그래서 성벽의 돌들이 작어 .
여기는 산봉우리마다 누각이 있었어 . 53 년도까지 거기서 놀기도 했지 . 이 마을도 산성을 쌓으면서 생겼어 . 위봉산성 쌓으려고 7 개 군의 사람들이 동원됐어 . 전라북도 다 동원되었다고 봐야지 .
일하러 왔다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생긴 마을이야 .” 위봉마을 소개 표지판 뒤로 조만간 개관을 앞둔 체험센터가 보인다. 위봉마을 체험센터가 건립되는 현장 앞에서 허윤석 (71) 이장을 만났다 .
“ 위봉마을에 있는 유적 관련해서 체험센터가 건립중인가 보네요 ?” 이 한 마디에 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 동학혁명 때 위봉사에 태조 어진을 모신 일부터 시작해 위봉마을의 역사 , 마을에 있는 자연물의 전설까지 . 그야말로 이 마을의 척척박사 .
그의 눈빛과 손짓에서 마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 책에도 나올까 말까 한 이야기들이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났다 . 위봉마을체험센터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허윤석 이장. “74 년도에 군대 갔다 와서 보니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서 농사일을 못하시는 거야 .
자식 된 도리로 이곳에 정착해서 같이 농사짓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 사회진출을 해야 되는데 .( 웃음 ) 부모님께 참 감사해 . 그분들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 그의 부모님은 전주 팔복동에 살다가 해방 이후에 위봉마을로 왔다 . “9 남매 중에 여덟째인 나를 여기서 낳았어 .
48 년에 . 태어난 지 3 년 만에 6.25 가 일어났어 . 그 난리 통에 얼마나 힘들었겠어 . 먹을 것이 없었잖아 . 내가 모유를 못 먹고 컸어 . 우유도 없었잖아 그때는 . 쌀도 없지 . 뭐 설탕 이런 것도 없지 . 그때는 보리에다가 물만 타서 먹었어 .
인민군들이 전부 여그 운장산에 주둔해있었어 . 인민군들이 가정에 와서 곡식도 털어가고 그랬어 . 안 그래도 먹을 것이 없는디 . 그 시절에 배고파서 얼마나 울었겠어 . 어려울 때라 젖도 못 얻어 먹인단 말이야 . 그런 세상에서 나를 살린거여 .
그런 생각에서 나이 많으신 부모님들 일하는 거를 차마 못보고 … . 우리 형제가 남자 셋 빼고는 다 여자야 . 일할 사람이 없는 거야 . 땅덩이는 크지 . 지금은 기계라도 있지 옛날에는 없었어 . 부모님 생각해서 같이 농사짓고 그랬지 .” 고등학교까지 다닌 사람은 형제 중 그가 유일하다 .
형님들은 초등학교까지 밖에 못 다녔다 . “ 공부한 사람이 그래도 부모 심정을 알잖애 . 어렵게 태어나서 안 죽고 살고 . 그래서 정착을 한 것이 지금까지 기여 .” 부모님의 키워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진 위봉마을과의 인연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는 허윤석 이장 .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을 포함한 지리적 명칭도 , 마을의 역사적 유물도 , 마을의 전설도 ,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 사랑하면 ‘ 보이고 ’ 사랑하면 ‘ 알게 된다 .’ 게다가 그는 단지 아는 것을 넘어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
“ 오성한옥마을서부터 저 위봉폭포까지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6 년간 도로 변 쓰레기를 주섰어 . 그래서 깨끗해 도로가 . 한 달에 두 번 . 최근에는 4 월 초파일 전날 주섰어 . 한번 주스면 한 포대 반 씩 나와 . 걸으면 못 줍잖아 . 그래서 오토바이 타고 내려가면서 한쪽 , 올라가면서 한쪽 .
그렇게 해서 비니루나 실조각 하나 없지 . 안하면 쓰레기 그대로지 .” 마을을 사랑하는 그에게는 꿈이 있다 . “ 어느 정도 좀 한가해지면 마을 전체의 내력을 기록으로 써놓으려고 그래 .”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