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돌아 마을 한 바퀴 벚꽃 만발하던 시기가 지났는가 이제는 꽃비가 되어 흩날린다. 어느새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4월의 포근한 기운이 산과 들에 스며든다. 봉실산의 품에 안겨있는 봉동읍 신봉 ( 新鳳 ) 마을 사람들도 바깥에 나와 마을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
농부들은 꽃샘추위가 지나고 본격적인 봄을 맞이해 농사 준비에 바쁘다 . 밭에 거름을 주고 땅을 갈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 분주하게 봄을 알리는 주민들의 발길 따스한 봄의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동네 한 바퀴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 봄이 허락하는 풍요로움이다 .
곳곳에 떨어지는 꽃들을 눈에 담았다면 씨앗을 뿌리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신봉마을의 계절을 느낄 수 있다 . 생강밭에 100 포대의 퇴비를 주고 있는 구자예 어르신은 이른 아침 나와 늦은 오후까지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 “ 날이 좋으니까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 이 밭에는 토종생강을 심으려고 .
이번에는 생강이 좋아서 맛있을 거 같아 .” 신봉마을은 생강 , 벼 , 고추 등 다양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 고개를 돌려 보니 곳곳에 밭에 나와 있는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 집 앞에 밭이 있는 이순주 (77) 어르신은 팥을 심고 있었다 . 순주 어르신은 “ 이제 슬슬 뭐든 심을 때야 .
남편은 뒤에서 토란이랑 깨를 심으려고 준비하고 있어 . 요새는 이렇게 씨를 심는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 남편 이병교 (80) 어르신은 “ 오늘은 거름을 주고 땅을 매고 있어 땅이 좋아야 작물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거든 .” 옆 밭에서는 고길예 (81) 어르신이 밭이랑에 나 있는 풀을 뽑고 계셨다 .
고추를 심기 전 땅을 고르게 하는 작업이다 . “ 풀은 뽑고 뽑아도 자라 . 그래도 해야지 . 주말에는 자식들이 와서 도와주기도 해서 수월해 .” 잠든 흙을 깨우는 주민들의 손길로 신봉마을은 봄을 맞이하고 있다 .
마을여자들의 탈출구, 삼바우정 당산제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 푸르른 병풍처럼 펼쳐진 봉실산과 옥녀봉 아래 자리잡은 신봉마을이다 .
마을 초입에는 커다란 바위 2 개가 놓여 있는데 , 서편에 단독으로 놓인 바위까지 통틀어 주민들은 삼바위 또는 구바위라고 부른다 . 별자리 같은 120 여 개의 성혈이 새겨진 삼바위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봉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다 .
특별한 날이면 삼바위 근처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고 풍물을 치곤 했는데 그 장소를 ‘ 삼바우정 ’ 이라고 한단다 . 마을회관에서 만난 고귀례 (92) 어르신은 삼바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 동네에서 당산제라고 치성을 드리는 행사가 있었지 .
떡시루와 술 등을 장만해서 주로 여자들이 지냈어 . 재깨골 , 당산나무 , 바우정에서 당산제를 지냈지 .” 귀례 어르신은 “ 결혼 안 한 젊은 여자들도 따라 나와서 막걸리 마시고 놀고 그랬다 ” 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
농사 , 살림 , 육아의 숨 가쁜 굴레 속에서 당산제는 마을 여성들의 일상탈출구였던 셈이다 . 그뿐만 아니라 당산제는 마을 여성들을 연결하는 단합의 장이기도 했다 .
구연순 (90) 어르신은 “ 여기 토박이나 나처럼 시집온 사람들이나 다 거기서 만나 놀았다 ” 며 당산제가 마을 여성들의 야유회였다고 설명했다 . 그땐 다들 마루 아래 생강굴 하나씩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옆 마을회관 입구가 저마다 다른 색깔의 유모차 ( 실버카 ) 로 북적북적하다 .
신봉마을 어르신들이 각자 점심을 먹은 후 하나둘 마을회관으로 모인 것이다 .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오후 2 시부터 5 시까지 마을회관의 사랑채는 어르신들로 꽉 채워진다 . 7~9 명의 어르신이 한데 모여 색칠 공부를 하고 , 수다를 떠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
유순임 (89) 어르신은 “ 우리 마을은 여자들이 제일 건강하고 오래 살아서 지금도 우리끼리 재미나게 잘 지낸다 ” 며 우정을 자랑했다 .
어떻게 우정을 나눴는지 묻자 이경자 (80) 어르신은 “ 동지 때 마을 사람들이랑 다 같이 손수 찹쌀을 빻고 새알심을 동글동글 빚어 팥죽을 쒀 먹었다 ” 며 팥과 쌀을 한 되씩 걷어서 끓여 먹었던 ‘ 팥죽 계 ’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신봉마을 사람들은 이처럼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 아닌 , 자주 만드는 반찬도 나눠 먹는 정겨운 사람들이었다 . 경자 어르신은 “ 내가 겉절이 새로 하는 날에는 밥을 많이 지어야 했다 . 맛있어서 다들 밥을 많이 먹었다 ” 며 웃었다 .
손수 고추를 갈아 김치를 만드느라 손이 욱신거리고 매워도 가족들과 주변 이웃들이 잘 먹었다고 배를 두드리면 그만큼 뿌듯한 게 없었다고 한다 . 먹고 남은 음식은 함박에 넣고 뚜껑을 덮어 생강굴에 보관하면서 꺼내 먹었다 .
임소순 (85) 어르신은 “ 그땐 다들 마루 아래 생강굴이 하나씩은 있었다 ” 며 생강 농사를 짓던 마을 사람들이 생강굴을 지금의 냉장고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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