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자락 가척마을 ] 곶감 익어가는 풍경 밤도 새벽도 빨리오니 부지런도 하여라 꺼먹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 서리가 내리면 곶감농사 시작돼 아름답다 . 눈 닿는 곳마다 탄성이 나오는 계절 . 찬 공기 , 바스락거리는 낙엽 , 단풍 물든 나무 .
운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 도로변에 있는 덕동마을을 지나 곧고 길게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 꽃으로 장식된 다리가 보인다 . 여기서부터 가척 ( 加尺 ) 마을이다 . 색색의 코스모스와 빨간 고추잠자리가 반겨주고 길가의 노란 벼이삭이 계절을 알리는 마을 .
“ 맛있는 건 새들이 먼저 알아서 먹어요 . 시커먼 부분 보이죠 ? 그 부분만 빼고 잡숴요 . 무른 건 다 잡숴도 돼요 .” 마을 초입 오경근 (53) 씨 가족은 감을 따고 있었다 . 마침 이날은 서리가 내리는 절기인 상강 ( 霜降 ). 올해 감농사는 냉해로 지난해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
마을주민 김승호 (47) 씨도 이 자연의 심술을 피해갈 순 없었다 . “ 올해는 감이 많이 안 열려서 금방 따요 . 속상하죠 . 요새 땡감 값이 비싸요 . 지난해 3 만 원 정도 했던 게 올해는 4 만 원 정도 . 상강 지나고부터는 곶감 작업 들어가야 해요 .
이제 온 마을이 곶감 깎을 시기죠 .” 가척마을은 27 가구 , 50 여명이 산다 .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조용한 마을이다 . 집에서는 천등산과 대둔산이 한 눈에 보여 어느 곳보다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 . 마을 이름 가척 . 더할 가 ( 加 ), 척도 척 ( 尺 ).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과거 이곳에는 나무를 다루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 지금 직업으로 말하자면 목수들이 많았고 , 과거에는 ‘ 가자티 ’ 로 불렸지만 이후 마을 이름이 가척이 되었다 . 마을을 둘러싼 뒷산은 예부터 ‘ 꺼먹산 ’ 이라 불렸다고 한다 .
산이 사방이다 보니 해가 일찍 졌고 다른 곳보다 밤이 빨리 와서다 . 반대로 해가 일찍 뜨다보니 마을사람들의 부지런함도 알아줬다 . 높은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있던 마을 토박이 하헌국 (60) 씨가 마을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
‘ 가지번데기 ’ 라 불리는 물이 나오는 골짜기 이야기부터 뒷산을 꺼먹산이라 불렀던 이야기 , 그 산의 소나무를 도둑맞은 이야기까지 . “ 가지번데기 물로 땀띠가 난 아이들이 3 번 씻으면 낫는다고 했어요 . 가물었을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대요 .
산가재가 많이 나와서 가지번데기로 불렸던 것 같아요 . 우리 마을 뒷산은 꺼먹산이라 불리는데 해가 빨리 져서 그래요 . 새벽에 밥 먹고 일하러 가면 다른 마을들은 그때서야 굴뚝에 불이 올라왔어요 . 부지런했죠 . 꺼먹산 꼭대기에는 진짜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도둑맞았어요 .
지금도 누가 가져갔는지 몰라요 .” ▲ 가을비 아래 경로회관 미술시간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오전 , 가척마을 경로회관에서 때 아닌 미술시간이 벌어졌다 . 사과 , 나뭇잎 , 물고기 , 하트 , 나비 등 여러 모양의 나무판에 이웃들 이름이 새겨져있다 .
“ 꽃다리에 화분을 놓고 남은 자투리 나무들로 집집마다 걸 나무 이름판을 만드는 중이에요 . 나무에 모양을 좀 내면 좋겠다 싶어서 예쁘게 했어요 . 경근이 아저씨하고 같이 .” 목공을 취미로 한다는 마을 주민 오경근씨와 하헌일 (52) 씨가 오늘의 미술 선생님이다 .
그들의 주도로 이웃들이 나무판에 각자 솜씨를 내고 있다 . “ 저희 아주버님이 글씨를 잘 쓰셔서 전담 화가를 맡아주셨어요 .” 성정순 (48) 이장의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헌일씨가 진지하게 작품에 열중한다 . 2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이웃들의 글씨를 써내려 간다 .
갖가지 모양의 나무판에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지고 마지막 ‘ 가척마을회관 ’ 이름표까지 완성됐다 . “ 내 것은 왜 이렇게 나무가 쬐깐한 데 써 준거야 . 애기들한테 써준 거 같어 .”( 이무자 할머니 ) “ 새로 써 드릴께 . 다시 한 번 골라보셔 .”( 하헌일 씨 ) “ 아휴 그르게 .
큼직한 사과에다 해주면 쓰겄네 .”( 최금자 할머니 ) 누군가는 마치 아이처럼 자그락거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큰 언니 , 오빠처럼 달래주기도 하는 모습 . “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면 그게 가족이지 뭐겠냐 ” 고 했던 한 마을 어르신의 말씀이 이 모습을 말했나보다 .
▲ 낯선 이들도 곧 이웃이 되는 동네 마을회관 바로 위에는 김옥분 (79) 할머니가 산다 . 빨래를 널러 나왔던 할머니는 객을 발견하고 한마디 건넨다 . 길을 따라 난 나무들이 낯선 이를 반겨줬듯 가척마을 사람들도 낯선 객에게 경계보다는 친근하고 호기심을 가진 눈빛으로 바라봐준다 .
“ 여그 와서 앉어 . 저그는 그늘졌응게 추워 . 햇빛 비치는 데로 앉어 .”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본다 . 마루 옆을 보니 벽이 검게 그을었다 . “ 이 가마솥에서 불도 때고 밥도 지어먹고 살았어 . 한 40~50 년 됐나 . 애들 키울라고 이 작은 뒷방에서 누에도 키웠네 .
자식이 다섯인 게 하루에 벤또를 5, 6 개씩 싸고는 혔어 .” 다섯 남매 키우랴 , 누에치랴 밤낮없이 분주했을 할머니의 집 . 느린 호흡으로 흘러가는 지금의 일상 . 할머니는 아주 잠깐 회상에 잠겼다 . “ 아들 둘에 딸 셋 . 얼마나 이쁜지 . 엄마 아프다고 약 사서 보내고 파스 사서 보내고 .
큰아들은 자주 와 . 대전에서 . 40 분 걸링게 일 끝나고도 저녁에 가끔 와 . 고맙지 참 .” 바람이 찼다 . 이종임 (82) 할머니는 이웃이 나눠준 감을 깎고 있었다 . 해가 비치는 마당 한 편에 자리 잡고 앉아 감자칼로 감 껍질을 쓱쓱 . “ 우리 집은 농사를 안 짓거든 .
이웃들이 못 파는 감을 줬어 . 상품가치 없는 거 . 우리는 이걸로 곶감 만드는 거여 . 오늘 이놈 다 깎고 집에 매달려고 . 날 좋으면 후딱 말러 . 곶감 되면 여럿이 나눠먹어야지 .” 가척마을은 아직도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
덕동마을을 지나 곧게 난 길이 마을을 지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한적하고 조용한 , 그리고 어여쁜 마을 . 운주를 지나는 우회도로 아래로 가척마을이 보인다 . 도로 위에서 보면 휙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농촌마을이지만 마을로 들어오면 우회도로 위에서 보았던 마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다 .
넉넉한 산이 마을을 품고 있는 조용하고 정겨운 곳 . 마을길을 따라 걷자니 볕이 참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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