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 동상면 ( 東上面 ) 은 몰라도 대아리 ( 大雅里 ) 는 안다 .” 는 속담이 고산에 있었다 . 저수지가 유명해 마을 이름 ‘ 대아리 ’ 는 알아도 ‘ 동상면 ’ 인지도는 낮다는 소리이다 .
‘ 대아저수지 ’ 는 1920 년 2 월 10 일 착공 , 1922 년 12 월 25 일 준공을 했는데 당시 건설비는 311 만 2 천원이었다 . 겉을 돌로 쌓은 ( 싸은 ) 호형 ( 弧形 : ⁀ ) 댐으로 물이 빠지면 지금도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골짝 어귀를 막아 물이 차니 물 안은 사람의 발길이 끊겨 귀한 동식물의 보고를 이루었다 . 4 철 물빛이 아름답고 가을 풍광은 금강산에 못지않으며 전엔 물 가운데 섬이 있어 유람선이 돌아 나오는 수상 놀이터요 , 호남평야를 적셔주는 농업용수의 수원 ( 水源 ) 이었다 .
한 때 전북수리조합 ( 全北水利組合 ) 소속이었으나 기구 개편으로 지금은 농어촌공사 소유이다 . 운암산이 첫 눈에 척 들어온다 .
산꼭대기 바위가 마치 서울 인왕산이나 도봉산과 같고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걸쳐 그 이름이 운암산 ( 雲岩山 ) 이며 , 군사훈련 요건이 좋아 부사관학교 야전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 새재 [ 新峙 : 신치 ] 는 저수지 공사 때 만들었고 비탈 길을 올라서면 여기부터 동상면 대아리이다 .
휴게소 주인 임병용 ( 완주문화원 이사 ) 씨는 황소 여섯 마리를 딴 전국 씨름선수이었다 . 흩어진 수몰민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아는 사람 둘이 있었으나 고인이 됐으며 고철곤 ( 의사 ) 아버지가 그 중의 하나이다 . 수면 위에 반도가 있고 여기에 고려 말 전주최씨 최용각 묘가 있다 .
애잔한 사연이 많다 . 저수지 수량을 늘리려고 지금의 둑을 쌓으니 물에 잠길 위기에 있었다 . 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라면 보상비 받아 이장하기 마련인데 최씨 고집답게 (?) 당시 농림부를 이겨 (?) 흙을 쌓아 올리고 봉분을 높여 현재 보는 바처럼 탈 없이 유지시켰다 .
대아재 ( 大雅齋 ) 와 묘역에 들어서면 대단한 집안임에 놀란다 . 3000 인이 밀어다 놓았다는 ‘ 삼천바위 ’ 가 아직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 . 완주는 이런 면에 어둔 편이다 . 이 지역을 소재로 한 이홍근 지음 장편소설 『 객토 ( 客土 ) 』 는 재미나는 졸부 이야기이다 .
주인공 강석준이 고향에서 남의 여자나 건들고 과부 성폭행을 하는 등 건들건들 지내다 서울에 올라가 돈을 벌었고 고향에 땅을 사며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듯이 오만 , 방자 , 난체를 하다 대아저수지 뱃놀이 중 술에 취해 빠져죽은 인생무상을 그려 놓았다 . 1986 년 동상면을 배경으로 쓴 책이다 .
옛날 운암산 서쪽에 ‘ 운암사 ( 雲岩寺 )’ 가 있었고 구치용 (1590 〜 1666) 은 절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 .
“ 손님 서봉에서 이르니 / 스님 대나무 문을 열어 맞아주네 ./ 술 한 동이로 달이 지는데 / 서리 맞은 국화는 황량한 뜰을 메웠구나 [ 客自西峰至 ( 객자서봉지 ) 僧開竹戶迎 ( 승개죽호영 ) 一罇山下月 ( 일준산하월 ) 霜菊滿荒庭 ( 상국만황정 )].
이 좋은 저수지에 유람선이 없어 옛날 운암사처럼 황량 ( 荒凉 )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대아저수지는 사람 빠져 죽는 물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삶의 터전으로 개발해야한다 .
턱의 수염이 대접을 받지 못하듯이 완주의 물은 고여 있거나 흘러갈 뿐 아직 주인이나 영웅 ( 英雄 ) 을 못 만나 제구실을 못한다 . 이런 걸 화이부실 ( 華而不實 ) 이라 한다 . ‘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 는 뜻 .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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