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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01.02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36

신(神)의 물방울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01.02 16:23 조회 3,6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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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神 ) 의 물방울 고대 인류가 열매를 찾아 바위에 올랐다가 웅덩이에 고인 물이 뿜어내는 먹음직스러운 향기에 이끌려 이내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그들은 알 수 없는 기이한 힘 앞에 엎드렸을 것이다 .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 , 경외 ( 敬畏 )!

그것이 술이라고 지칭되기도 전의 세상에서 이 오묘한 액체는 물과 불 , 해와 달 , 산과 강 , 모든 압도적인 존재들에게 경배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 문명이 생겨나 인간이 술을 다룰 줄 알기 시작할 때도 술에 대한 경외심은 최초의 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고대 이집트 벽화에 그려진 포도로 술을 빚는 모습 위키미디어
고대 이집트 벽화에 그려진 포도로 술을 빚는 모습 위키미디어

중국 하 ( 夏 ) 나라 우 ( 禹 ) 왕은 중국 최초로 술 빚는 사람으로 기록된 의적 ( 儀狄 ) 이 빚은 술을 맛보고 “ 후세에 틀림없이 이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일이 있을 것이다 . 後世必有以味亡基國者 ” 라고 말하며 의적을 멀리하였다고 한다 .

천하를 가졌고 자신을 이미 신이라 여겼을 우왕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 그리스 신화에 포도주를 인간 세상에 전파한 술의 신 , 디오니소스의 이야기에서도 서양인들이 술과 처음 대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

아테네의 목동 이카리오스는 디오니소스에 게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 담그는 법을 배워 자신이 담근 포도주를 마을사람들에게 먹였다 . 붉은 핏빛이 도는 물을 마시고 오묘한 기운이 돌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자 사람들은 이카리오스가 독을 먹인 것이라 분노하여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숲에 버렸다 .

그의 딸 에리고네는 아버지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하고 슬픔에 빠져 나무에 목을 매 죽고 만다 . 아름다운 에리고네를 사랑했던 디오니소스는 분노하여 아테네의 처녀들이 스스로 목을 매 죽게 하는 광기의 저주를 내린다 .

아테네인들은 신탁으로 디오니소스의 분노를 헤아리고 포도주를 빚어 이카리오스와 에리고네를 위한 제사를 올렸고 , 포도를 재배하여 술을 담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이성과 문명이 맞물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경외의 대상은 하나씩 사라져 갔다 .

감히 닿을 수 없던 설산도 , 해와 달도 인간에겐 정복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 자연과 신의 섭리로 만들어진다 여겼을 술도 더 이상 신비에 싸인 ‘ 신의 물방울 ’ 이 아니다 . 미생물을 이용해 원하는 술을 만들어내고 , 기계들이 끊임없이 술병을 쏟아내는 산업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부터였을 것이다 .

서양에서는 기껏 이백 년 , 한국에서는 불과 백 년도 안 지난 짧은 시간 동안 술은 어느새 기호품으로 전락해 너무 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고 , 술이 지닌 광기를 통제하느냐 못하느냐는 오로지 개인의 이성과 선택에 내맡겨져 버렸다 . 사람의 손길로만 술이 빚어지던 세상에서 술은 온화했다 .

가족과 이웃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빚은 술은 노동의 피로를 풀어줬고 , 아픈 사람에게 약이 되기도 했으며 , 친지와 이웃 간의 친밀감을 더욱 견고히 해주는 끈이었다 .

사람들은 대를 이어 술 빚는 법을 가르치고 배웠으며 , 그렇게 정성껏 빚은 술은 제사에 올리거나 귀한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이하는 최상의 선의였다 .

고대 인류가 자신들의 생사를 관장하던 신 앞에 바쳤던 술 , 중국 우왕과 고대 아테네인들이 처음 술을 마시고 느꼈던 경외심은 술을 빚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 모두가 다시 찾아내야 할 기억이다 .

양조인은 최상의 술을 빚기 위해 노력하고 , 마시는 사람은 정성껏 빚은 술에 예우를 갖춰 마신다면 세상은 좀 더 깊어지고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다 .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현장 사진

신(神)의 물방울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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