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력이 닿는 한 병오년, 붉은 말의 해로 접어든 지 며칠이 지났다. 간지 그대로 활기가 넘치고 진취적인 해가 되리라는 덕담이 오간다. 이래저래 그늘이 짙었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제발 그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 온다.
새해를 맞고 보니 자연스레 나이를 꼽아보게 되고 이제 환갑, 진갑 다 지난 몸이 되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물론 그것을 현실문제로 여기거나 의식하지는 않지만 ‘말값’이라는 게 있어 환갑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가 않다.
그러니까 환갑을 지나면 살 만큼 살았으니 축하 잔치를 베풀고, 언제 세상을 떠도 ‘호상’이 되던 게 그리 오래전 얘기가 아니란 말이다. 내 기억만 떠들어봐도 그렇다. 농사꾼이던 우리 할아버지는 갓 쉰을 넘기자 농사일에서 손을 뗐다.
느닷없이 고된 농사일을 혼자 떠맡게 된 우리 아버지는 삽자루를 내팽개치는 것으로 언짢은 심사를 드러내고 말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게 그리 중뿔난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환갑 잔치상까지 받고 보면 농사 일선에서 물러나는 건 당연하고 그때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가 된 지 오래다. 잔칫상은 그만두고 아무도 환갑을 챙기지 않는다. 오히려 뜻하지 않게, 그리고 장난기가 잔뜩 묻어나는 ‘환갑 생일상’을 받기라도 하면 낭패로 여기거나 몹시 언짢아하는 게 요즘 세태인 듯하다. 게다가 농사일을 그만둔다는 게 어디 될 말인가.
어디 한 번 들녘에 나가보라. 트랙터를 몰고, 콤바인을 돌리는 작업자들은 대부분 환갑을 훌쩍 넘긴 이들이다. 게 중에는 일흔을 헤아리는 이도 꽤 된다. 육십대가 마을 ‘청년회장’을 맡는 세상인데 당연한 일 아닌가. 내 주변에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 논배미에서 김을 매고 물꼬를 보는 이도 더러 있다.
또한 소막(우사)에서는 사료를 주고 여물을 먹이며 소를 키우는 이들도 보인다. 물론 시설(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농사현장이라면 어디를 가든 어렵잖게 나이 든 농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현시대에 접어들어 삶의 질이 나아지고 의학이 크게 발달하면서 인류의 수명이 크게 늘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과연 그럴까? 수명이 늘면 생애 노동기간도 그만큼 늘어나는 게 당연할까? 육십 평생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편히 쉬면서 여유를 누릴 만도 하지 않은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새끼들 번듯하게 키워내기 위해 아등바등 매달리느라 미뤄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즐기면서 자신의 온 삶을 찬찬히 갈무리할 때 아닌가 말이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만 너도나도 농기계를 몰고, 소막을 지키고,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왜?
갚아야 할 농기계 할부금이, 축산-시설채소 융자금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갚으려면 딱히 다른 수가 없다. 설령 이미 다 갚았다 하더라도 멀쩡한 기계와 시설을 그냥 놀리자니 너무 아까운 건 당연한 노릇이다. 나는 지금 돌을 던지려는 게 아니다.
농사꾼의 실존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실 나 스스로도 기력이 닿는 한 벼농사를 계속 지을 생각이다. 기계 할부금이 남아서도, 시설 융자금이 있어서도 아니다. 쌀 팔아서 주식하고, 강남 아파트 투기하겠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고. 문제는 ‘나이듦’ 자체가 아니라 농사꾼 자신의.
대안과 공동체의 상호작용 아닐까?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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