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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01.02

이종민의 다스림의 음악

서글픈 축복, 망각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01.02 16:32 조회 3,68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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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축복 , 망각 – 피아졸라의 [ 망각 ](“Oblivion”) 치매 어머니를 모시면서 망각으로 인한 낭패에 자주 시달립니다 . 약을 금방 드시고도 약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립니다 . 아침 식사를 하며 “ 오늘 학교 가 ?” 를 열 번 넘게 되물으십니다 . 하지만 다행스러워 할 일도 많습니다 .

치매 노인 모시다 보면 자주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되는데 이것도 금방 잊으십니다 . 반복되는 질문에 그냥 건성으로 대답해도 됩니다 . 어차피 또 물으실 테니까 . 치매의 경우가 아니라도 망각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 낡은 것을 비워야 새롭게 채울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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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정보홍수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 그래서 ‘ 망각 기술 ’ 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 ‘ 이성에 의한 정보 거부 능력 ’ 을 갖추어야만 제대로 된 예술창작이나 철학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기억의 사슬에 얽매이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없습니다 .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로 나갈 수 없습니다 . 심하게는 또렷한 기억이 오히려 저주스러울 수 있습니다 . 살면서 겪게 되는 불행한 , 때로는 치욕스러운 경험을 떨쳐버리지 않고는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 무의식의 영역으로 침잠해버리면 평생을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됩니다 .

누구나 망각의 강을 건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 과거의 굴레를 훨훨 털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충동 혹은 욕망 . 하지만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것이 있으니 ‘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부풀린 세상의 상식 ’ 이 그것입니다 .

그 진부한 상식의 기억에 묶여 자기 혁명의 결기가 한 잔 소주에 녹아버리거나 담배 연기로 훅 흩어져버리곤 합니다 . 망각은 저주인가 ? 아니면 축복인가 ? 반길 일인가 안타까워할 시련인가 ? 빠져드는 늪인가 ? 떨쳐버리고 가볍게 흘러가야 할 여울 같은 것인가 ?

탱고의 대가 피아졸라 (Astro Piazolla, 1921-92) 가 [ 망각 ](“Oblivion”) 이라는 곡으로 화두를 던지자 많은 연주자들이 나름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 하지만 세상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그러하듯 애매하기만 합니다 .

김지윤은 바이올린을 통해 비교적 밝게 반응하지만 그 청명한 현의 울림에도 슬픔의 기운이 숨어 있습니다 . 웨버 (Julian Lloyd Webber, 1951~) 의 첼로 또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슬픔이 주 정조를 이루지만 차분하게 위로하며 어루만져 주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

서글픈 정조는 반데네온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 하지만 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슬픔이 오히려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 망각이 그런 것인지 음악 본연의 속성 때문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피아졸라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곡은 , 원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실내악으로 작곡되었지만 반데네온 , 바이올린 , 첼로 , 클라리넷 , 오보에 , 색소폰 등으로 계속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 애매하게 슬프고 아름답기도 한 망각의 느낌을 잘 그려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자이자 반데네온 연주자입니다 . 탱고를 좋아하던 이탈리아 이민자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탱고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 가난 때문에 온 가족이 잠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는데 이곳에서 그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심취하게 됩니다 .

16 살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탱고밴드 트로일로 밴드의 반도네온 주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 본격적인 고전음악 공부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오히려 탱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자기 음악의 정체성도 찾게 됩니다 .

스승으로부터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음악에 집중하라는 충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 그는 이 깨달음에 근거하여 아르헨티나 전통음악의 하나인 탱고를 클래식이나 재즈 어법과 결합시킨 새로운 개념의 탱고 , 이른바 ‘ 누에보 탱고 ’(Nuevo Tango) 를 창안하게 됩니다 .

춤 반주음악을 예술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 오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것은 정작 잊지 못하고 짐처럼 무겁게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 연주 들으시며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 이종민 은 40여 년간 지켜온 대학 강단에서 물러나 고향 완주에서 인문학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장 사진

서글픈 축복, 망각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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