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품앗이칼럼 · 2023.08.29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 두 달 20

방앗간에서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3.08.29 10:59 조회 4,237 댓글 0
목록으로 돌아가기

방앗간에서 백세 ( 百洗 , 쌀씻기 ) 를 마친 쌀은 여덟 시간 정도 찬물에서 불린다 . 물을 충분히 머금은 쌀이라야 고두밥을 찌든 죽을 끓이든 잘 익기 때문이다 . 불리기가 끝나면 쌀에 손을 대지 않고 샤워꼭지 물길로만 잔류해 있던 쌀뜨물과 나머지 싸라기를 헹군다 .

쌀알이 조금만 힘을 가해도 깨지는 매우 약해진 상태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 헹구기를 마치면 쌀을 체에 밭쳐 물기를 빼고 쌀가루를 빻으러 방앗간에 간다 . 쌀가루를 빻아 소분해 냉동실에 보관해두면 언제든 죽이나 범벅 , 설기떡 등의 방법으로 밑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죽으로 밑술을 빚기 위해 방앗간에서 빻아온 쌀가루
죽으로 밑술을 빚기 위해 방앗간에서 빻아온 쌀가루

오후 5 시를 지나 들른 방앗간 안이 어둡다 . 기척은 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공간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더 안쪽에 있는 공간에서 사장님이 분쇄기에 마늘을 가느라 소리를 못 들으신 모양이다 . 들어왔던 문 쪽으로 다시 가서 기다렸다 .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

문 앞쪽의 가장 넓은 공간에는 고추나 통밀 등을 빻는 큰 기계들이 있다 .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번째 방엔 쌀 같은 가벼운 것들을 빻는 기계가 있고 , 더 안쪽엔 물기 있는 것들을 가는 커다란 분쇄기와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

방앗간은 기계마다 먼지와 가루가 묻어있고 , 집기와 물건들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 알면서도 왔지만 , 집 앞에 가까운 방앗간이니 조용히 입 다물 수밖에 없다 . 사장님은 기계 위에 겹겹이 포개 놓은 빨간 고무다라이 하나를 꺼냈다 . 다라이 안에 묻어있던 정체 모를 반죽 찌꺼기를 성급히 훑어낸다 .

“ 어저께 쌀가루 빵군다고 써서 그려 . 암시랑 안혀 .” 민망한지 내 눈치를 살짝 보셨지만 크게 신경 쓰시지는 않는 것 같았다 . 롤러도 언제 쓰고 다시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쌀이 들어가면 그 안에 찌꺼기를 그대로 닦아서 나올 것 같다 . 백세가 다 무슨 소용인가 .

오백 번을 휘저어 깨끗하게 씻은 쌀인데 사장님은 마늘을 빻던 고무장갑을 낀 채 쌀가루를 무심히 쓸어 담았다 . 만원을 드리니 칠천 원을 거슬러 주셨다 . “ 우리 집 아자씨나 나나 옛날에는 막걸리 한 병씩은 너끈 마셨는디 시방은 늙어서 약봉다리만 끼고 살어 .

술은 입에 대도 못혀 .”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던 시절엔 방앗간도 화려한 시절이었으리라 . 고추를 빻고 , 기름을 짜고 , 도토리를 갈고 , 일 년 내 제사 , 명절 , 결혼식 , 회갑잔치 , 돌잔치 , 장례식 , 고사 등 떡을 맞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

그랬던 시절 이 방앗간에도 갈무리한 것들을 이고 지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저 문턱을 넘으며 말을 걸어왔을까 . 문턱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 먼지 낄 날이 없었을 것이고 , 그때는 젊었던 사장님도 생기가 넘쳤을 것이다 .

그녀의 일이 많은 이들에게 늘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 점점 쇠락을 거쳤을 먼지 낀 방앗간 기계들과 사장님의 일이 애잔해져 왔다 . 외식 , 배달 , 포장에서 꺼내 끓이기만 하면 되는 밀키트의 시대로 식생활이 급변했다 .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곡식을 거두어 말리고 , 빻고 , 기름을 짜던 인간의 오래된 일은 세분화된 산업사회에서 수많은 가공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 우리 동네 둔산방앗간은 끝내 문을 닫고 청과물 가게가 들어섰다 . 요즘엔 좀 더 먼 곳에 있는 은하방앗간을 간다 .

젊은 사장님이 일에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 모두가 예전의 방식대로 살 수는 없으나 , 익명의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먹거리를 장만하려는 이들을 위해 묵묵히 기계를 돌리고 있는 방앗간이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현장 사진

방앗간에서 사진 1

첨부자료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