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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2.09.22

유송이의 술과 함께 열두 달 9

술 짜는 날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2.09.22 14:24 조회 4,37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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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짜는 날 술 빚는다고 고두밥 찌는 날엔 덕지덕지 손때 절은 아이들이 신났고 , 술 짜는 날엔 몰래 먹는 술맛을 알아버린 동네 더벅머리 총각들이 신났다 .

추석 전날이면 타지에 사는 사촌들까지 돌아와 동네는 한껏 들썩이고 , 누구네 집 술 짜는 날만 기다려 어른들 몰래 훔쳐 온 막걸리 한 바가지에 밤새는 줄 모르고 놀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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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썩대는 기분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여서 기름진 고기산적에 뻘건 동태찌개가 상에 올라오면 탁주 사발이 오가며 호탕한 둘째 작은아버지의 농담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

괄괄한 넷째 작은아버지가 알 길 없는 부아를 못 이기고 토방을 뛰쳐나와 씩씩거리며 집을 나가버려도 이내 서울 고모할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그 아들이 또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고 , 아이들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다 .

술을 짤 때마다 나는 어릴 적 북적대던 명절 전날 풍경이 떠오른다 . 부침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고 ,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

종일 부뚜막에 땐 불로 더운 방에서 사촌들이 뒤엉켜 자고 , 몇 달 차이로 아이를 낳은 엄마와 숙모가 젖을 물리며 나누는 얘기를 듣다 가뭇가뭇 잠이 들면 어느새 여름은 가고 서늘한 가을밤이 내려앉았다 .

어린 눈에도 궁색한 세간이었지만 고향 집은 아버지의 여섯 형제와 딸린 식구들이 들어차도 다 품어주었다 . 그 많은 입을 채울 음식이 만들어지고 ,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이 찾아와도 허물없이 반가웠던 그런 날들이 다시 올까 .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내 품이 좁고 후덕하지 못한 탓이 아니고 세상이 변했다고 핑계를 대본다 . 죽기 살기로 경쟁에 내몰려 보니 내 품 안의 것이 아니면 형제도 이웃도 살피기 버거운 세상이 되어있더라고 말이다 . 씁쓸한 생각에 닿고 보니 어느새 뽀얀 탁주가 대야에 넘실넘실 차 있다 .

한 달간 숙성을 거친 술덧 위로 맑은 청주가 고이면 술 짜기를 결정해야 한다 . 술 짜는 날은 지난 한 달 애를 태우며 기다린 술을 만나게 되니 여간 설레는 날이 아닐 수 없다 .

그럴수록 술 짜는 날 역시 빚는 날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 고대하는 술을 만나길 소원하는 만큼 가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 애쓴다 . 날씨가 흐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 바쁘거나 피곤한 날은 피하곤 한다 .

대야 위에 쳇다리를 걸치고 체를 올린다 . 체에 자루를 올려놓고 술독을 쏟아붓는다 . 술덧이 툼벙툼벙 술자루에 담기면 쳇다리 밑으로 뽀얀 탁주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다 . 술자루를 오므려 눌러가며 한 덩어리의 술지게미가 남을 때까지 술을 짜낸다 .

쌀 , 물 , 누룩 외에는 어떤 첨가물도 없이 발효시켜낸 원주 ( 原酒 ) 이다 . 쌀이 농축된 구수한 향과 달고 새곰한 과일 향을 옹골지게 품은 탁주가 주룩주룩 떨어지는 소리는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

술을 걸러 대야에 가득 채우면 풍요롭던 어린 시절 명절 전날을 떠올리다 이내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나의 다정한 이웃들을 떠올리게 된다 . 일상의 소소한 편린들을 살뜰히 챙겨주며 안부를 물어주던 사람들 ! 나 또한 술을 짜며 벅차오르는 이 풍요를 기꺼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 !

추석을 앞두고 정성껏 빚은 이 술로 당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감사를 전할 수 있길 고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막 거른 술 한 모금을 마셔본다 . ........ 명절 전날의 소란스러움과 같은 생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현장 사진

술 짜는 날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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