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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10.21

농촌별곡

극한의 더위가 꺾이는 순간에 가을이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10.21 14:19 조회 1,30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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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더위가 꺾이는 순간에 가을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가을비가 내린다 . 아련하고도 낭만이 깃든 < 가을비 우산속 > 의 그 비가 아니다 . 농사꾼 처지에서는 ‘ 아무짝에도 ’ 쓸모없는 게 바로 가을비다 . 왜 아니 그렇겠나 .

결실의 계절이고 거둬들여야 할 것 천지인데 이리 주야장천 비가 내리면 어쩌란 말인가 . 내가 짓는 벼농사만 해도 그렇다 . 논바닥이 보슬보슬 말라 있어야 수확기계 ( 콤바인 ) 가 별 어려움없이 작동하는데 물이 고이고 진창이 되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오는 비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늘만 바라볼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 게다가 올해는 깨씨무늬병이 크게 번졌다 . 벼잎과 줄기에 깨씨 모양의 갈색 반점이 생기고 끝내는 이삭이 고스러져 쭉정이가 되는 곰팡이병이다 .

기후변화로 갈수록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고온다습해지니 병충해가 극성을 피우기에 딱 알맞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 온통 불그죽죽한 논배미부터 듬성듬성 번진 곳까지 피해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만큼 소출이 줄어드는 걸 피할 수 없다 .

그나마 10 년 넘게 나락을 건조하고 방아를 찧어주던 정미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 이거야말로 엎친 데 덮친 꼴 아닌가 . 그동안 안정적으로 쌀을 얻어왔는데 수확을 코앞에 두고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 대체할 곳을 찾는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조건을 갖춘 시설을 찾기가 그리 여의치가 않아 걱정이다 .

이래저래 속이 타고 심란한 가을이다 . 그래도 어쨌거나 가을걷이 준비는 해야 하니 넋을 놓고 널부러져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 추수 전에 해치워야 할 마지막으로 해줘야 하는 게 둑치기다 . 수확기계에 큰키 풀이나 넝쿨이 엉키는 걸 막고 작업자의 시야를 확보하려 함이다 .

한여름에 예초기를 돌려 둔 덕분에 풀이 우거지지는 않았다 . 작업이 순조로워 여드레 걸리던 일이 채 이틀도 안 돼 끝났다 . 기운이 남아돌아 내친김에 뒷산 산책길을 정리했다 . 극심한 기후변화 탓에 숲 또한 나무와 덩굴로 빽빽이 우거지니 낫으로는 모자라 예초기까지 들이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어쨌거나 오솔길을 가지런히 다듬어 놓았으니 하루 한 시간 남짓 맑은 기운 속에서 사색에 빠져들 수 있겠지 . 수풀을 정리하며 산자락을 둘러보니 밤나무에서 쏟아진 알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 예전 같으면 보이는 족족 주어 담았을 텐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손이 가지 않는다 .

이래저래 마음이 심드렁한 탓일까 . 가을이 뭐 이래 ? 따지고 보면 이 가을이 그리 심드렁한 것만은 아니었다 . 올해 ‘ 기후정의행진 ’ 은 서울로 올라가는 대신 고산에서 진행됐다 . 만장과 풍물패를 앞세우고 읍내를 한 바퀴 돌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렸다 .

이어 완주미디어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 노 임팩트 맨 > 을 함께 감상한 뒤 여러 주제를 놓고 ‘ 기후위기 솔직정담회 ’ 가 이어졌다 .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저마다 자신의 절박한 각오를 털어놓았다 .

저녁식사 뒤에는 ‘DJ 공연 ’ 형식의 오픈마이크 행사가 이어져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 추석연휴 끝 무렵에는 폭염 탓에 한동안 접어두었던 등반을 다녀왔다 . 영암 월출산 , 그곳에 초가을이 있었다 , 앞으로도 ‘ 별밤극장 ’ 이며 ‘ 햅쌀밥잔치 ’ 같은 가을을 핑계로 한 잔치가 이어질 것이다 .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심란한 마음도 시나브로 풀어지고 “ 역시 가을은 가을이야 !” 할 날이 올 수 있을까 . 자못 굼금해진다 . /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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