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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19.04.01

할머니의 오래된 집 2부: 내 손으로 일군 땅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19.04.01 11:24 조회 1,67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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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오래된 집 2 부 내 손으로 일군 땅 - 이서 갈동마을 김양금 할머니 김양금 할머니의 묵은 살림에는 곰삭은 인생이 담겨있다 . 그 이야기를 한 번에 꺼내놓는 것이 차마 아쉬웠다 .

집 주변에서 캐온 쑥 , 돌나물 등을 다듬는 할머니의 손 , 흰 머리 , 얼굴의 주름들을 바라보며 옛날이야기들을 계속 듣고 싶었다 . 아쉬운 마지막 이야기다 . 김제 너른 평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양금 할머니 (83 ) 는 스무 살에 이서면 갈동마을로 시집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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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새색시였을 때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 마을 앞뒤로 큰 도로가 나고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 할머니가 살고 계신 갈동마을의 옛 이름은 ‘ 치릇마을 ’ 이었다 . “ 새색시 시절에 마을 어르신들이 하는 말을 들었지 . 앞에도 산 , 뒤에도 산 . 산에 폭 안겨 있었지 .

지금 도로 있는 곳이 다 산이었어 . 그러니까 꿩이 숨어든다고 꿩 치 雉 자를 써서 치릇마을이라고 했고 , 또 마을 뒤로 옻나무가 많았는데 그래서 치릇골 이라고도 했는가 ..”  양순 할머니 집은 지어진지 200년 이상 됐다. 부엌 위 서까래는 그을렀고 오래된 주춧돌도 세월에 깎여나갔다.

치릇약방 며느리 . 곁에 남은 육남매 할머니의 시아버지는 그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어서 동네에서 글도 가르치고 ‘ 치릇약방 ’ 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셨다고 한다 . “ 우리 시할아버지가 하시던 한약방을 시아버지 ( 故 임익환 ) 가 이어 받아 했지 .

유명해서 익산이나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 . 약 짓는 곳은 대문 밖으로 문이 있었는데 댓문으로 들어오면 사철나무가 문 양옆으로 예쁘게 있었지 . 약 지러 오는 사람들은 그 댓문으로 돌아서 약방으로 드나들지 . 처음 시집와서는 3 년은 문밖을 못나갔어 . 새색시라고 해서 .

우리 시집이 엄했어 . 울안 시암도 있으니까 집안에서만 살림했지 .” 사철나무가 예쁘던 치릇약방에서 8 년을 살다가 분가했다 . 할머니 나이 31 살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시아버지가 살던 집이 비어있게 되자 할머니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 그 집이 할머니가 현재 거주하고 계신 집이다 .

이서면의 큰 부자였던 김공태라는 분이 지은 집으로 200 년도 넘었을 거라고 하신다 . 그 사이 육남매를 낳았고 막내가 막 돌을 지났을 무렵 ,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 할머니 나이 37 살이었다 .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약방 .

시댁에서 일하는 일꾼들 , 시댁 식구들 모두 떠나고 할머니와 여섯 아이만 남게 되었다 . “ 나 혼자되었을 때는 여자들이 어디 가서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엄두도 못 냈지 . 누가 시집을 다시 가라고 하는데 , 우리 막둥이 돌 지난 거 있고 , 위로 새끼들은 줄줄이 있지 , 어떻게 갈 것이여 .

시골에서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농사밖에 더 있어 . 애들 논 두덩에다 데려다 놓고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거지 . 해가 지면 모기가 무니까 우리 아이들이 막 울어 .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논밭으로 일하러 가면 나 따라 오는 거야 . 애들이 울어도 그래도 나는 못가지 .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가는 거니까 . 겨울에는 전주 가서 건어물 떼다가 집집마다 팔러 다니기도 했지 . 우리 막둥이 업고 장사하러 다녔는데 눈길에 둥글러지기도 하고 .. 애들들 데리고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지 .” 김양금 할머니는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떼서 생활한다. 그을음에서 세월을 엿본다.

할머니의 곰삭은 살림살이들. 돈 벌러 떠났다가 20 년 뒤 다시 돌아온 내 집 시골에서는 도저히 육남매 굶기지 않고 살 방법이 없었다 . 스무 살이 지난 큰 딸이 전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아이들을 큰 딸에서 맡기고 할머니는 홀연히 인천으로 떠났다 .

“ 마흔 일곱에 인천으로 올라갔는데 아이고 말도 못혀 . 할 줄 아는게 있어야지 . 우리 외사촌이 그려 순대 장사를 하면 괜찮다고 해서 순대 전문점들이 모여 있는 석바위 시장으로 갔지 . 순댓집 아줌마한테 내 사정 이야기 했더니 순대 만드는 것을 알려주더라고 . 그렇게 허드렛일 하면서 배운 거지 .

그 뒤에 청천상가라고 조그만 시장이 생긴다고 해서 거기 쬐그만한 좌판 하나를 빚내서 얻어서 순대장사를 시작한 거지 . 한 쪽 구탱이에 연탄을 조그맣게 놓아두었어 . 거기서 순대 끓이고 . 거기가 따뜻하니까 구부리고 먹고 자고 살았지 . 겨울에는 몸 여기저기 얼음 배겨가지고 얼어터지고 그랬어 .

2 년을 고생하니까 방 하나 구할 돈이 모아져서 전주에 있는 애들을 오라고 해서 같이 살았지 .” 할머니는 평생 쉬어본 일이 없다. 야채장수, 식당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오후에는 마을회관에 나와 이웃들과 시간을 보낸다. 어디 가서 한가하게 한 번 놀아 본 적이 없었다 .

야채 장수 , 식당일을 하다 보니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옮겨갔고 어느 덧 25 평짜리 낡은 아파트 한 채가 자신의 몫으로 생기더란다 . 환갑을 보냈고 자식들도 시집장가 가서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었다 . 그런데 왜 그 집이 다시 생각났을까 . 20 년 가까이 비어있던 그 집 .

한 때는 육남매가 고물거리던 그 집 . 할머니보다 두 살 위의 남편과 살 던 그 집 . 하루 종일 빛이 잘 들던 그 집 . 김양금 할머니는 혼자 ,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다 . “ 땅 만지면서 일하고 싶더라고 . 애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인천가기 전까지는 그래도 여기 땅에서 내가 일한 기억이 있으니까 .

내 땅 일구며 사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 . 2002 년도 다시 여기 왔을 때 댓돌 앞까지 대나무가 꽉 들어차 있었어 . 방문도 떨어지고 집이 엉망이었지 . 그래서 동네 이웃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해 뜨면 와서 대나무를 자르고 그랬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더라고 .

그래서 종이 사서 싹 바르고 , 장판 얻어서 깔고 아궁이에 불 때가면서 이 집에서 먹고 자면서 대나무를 끊으며 겨울을 난 거지 . 톱하고 낫 하나 가지고 10 월 말에 와서 하루에 조금씩 끊어서 다음해 2 월까지 그 짓을 했지 . 사람도 안 부르고 혼자서 했어 .

그렇게 저렇게 살다보니 한 세월이 다 갔지 . 마지막 살 곳을 내 손으로 만든 거야 . 지금 제일 편해 . 인천 애들 집에 가면 일주일도 못 있어 . 답답해서 . 그렇게 오고 싶어 . 여기 내 집으로 오고 잡어 .

내가 일평생 살면서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을 뽑아보라고 하면 이 집 대나무 끊어서 밭 만든 일이야 ”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 양순 할머니는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이다.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살던 그때를 기억하며.

꿩이 날아드는 산과 그 산의 옻나무들이 사라지는 사이 할머니가 사는 마을의 옛날 흙집들은 진작에 사리지고 없다 . 하지만 김양금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웃들은 여전히 땅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 할머니의 새색시 시절과 남편을 먼저 보낸 눈물을 기억하는 이들이다 .

오래 전에 묻어놓았던 유물을 발굴 하듯 과거에서 꺼내 놓은 그 집에서 할머니는 현재를 살아간다 .

현장 사진

할머니의 오래된 집 2부: 내 손으로 일군 땅 사진 1

첨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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