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미경의 삶의풍경 · 2018.01.08

싸움꾼 목사님의 1987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18.01.08 14:50 조회 1,826 댓글 0
목록으로 돌아가기

싸움꾼 목사님의 1987 비봉면 원봉산마을 여태권 70년대부터 율곡교회 목회 농민소득 향상-공동체 운동 병행 완주 친환경농업 이끈 산증인 여태권 목사는 봉실산 아래 815 농장이라는 작은 나무현판을 달고 소 스무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

80 년 광주와 87 년의 민주화운동은 어른들이 들려주는 산업화시대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와 겹쳐져서 앞선 세대가 만들어내고 들려준 일종의 역사적인 이미지들로 남아있었다 . 삼십년 전 1987 년 여름을 거리에서 보냈던 청춘들의 아이들이 자라서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겨울을 보냈다 .

IMG 3350
IMG 3350

그리고 얼마 전 영화 ‘1987’ 이 극장에 올랐다 . 나에게 이미지들로만 남아있던 그날의 일들을 보았다 . 영화의 원제는 ‘ 보통사람들 ’ 이었다고 한다 . 거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 , 노동자들 , 회사원들 , 학생들 . 특별한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였다 .

서울에서 시작 된 시위는 부산 대전 광주 전주 ,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때 완주의 사람들도 초포다리를 건너 관통로 , 팔달로로 향했다 . 그 중심에 있던 여태권 목사는 고산 율곡교회에 막 부임한 삼십대 혈기왕성한 목사였다 .

여태권 목사가 몰고 다니던 낡은 봉고차는 전쟁터를 누비는 수송차였다 . “ 그 봉고차가 참 유명한 차인디 .. 봉고차로 사람도 나르고 물품도 나르고 그랬지 . 거기에 시위 때 쓰는 모든 물건이 다 들어 있었어 . 현수막 , 현수막 세우는 대나무 축대 , 하여간 잡다한 것으로 그 뒤에 꽉 차있었어 .

그때는 나갈 길이 용진 밖에 없으니까 초포다리 건너기 전에 검문소가 있었어 . 수상한 차들은 다 못나가게 했지 . 검문소에서 경찰이 멈추라고 하면 거기서 서는 척하다 팍 도망가 버리지 . 서라고 뒤에서 쫓아오지만 소용없어 . 서간 ? 내가 안 서지 .” 촛불거리와는 다른 거리였다 .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무서운 때였다 . 나는 종종 생각한다 . 삼십년 전의 나였다면 거리로 나갈 수 있었을까 . 시골교회의 목사는 왜 거리로 나갔을까 . “ 그지 . 엄청난 내적인 갈등이 있었지 . 거리로 나가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잖아요 .

나가면 최루탄 마시고 두드려 맞기도 하고 경찰서 잡혀가기도 하고 .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데 그 긴장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거죠 . 하기가 싫지 , 하지만 그때는 안 할 수가 없었어요 . 왜냐 ..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목사가 되어서 이걸 안하면 안 된다 .. 사명감이죠 .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거리로 나선거지 . 우리는 별로 안 무서우니까 . 난 목사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 . 전두환이 그랬데잖여 . 목사들 건들면 재수 없으니까 건들지 말라고 .

그러니까 시위할 때 성직자들이 맨 앞줄에서 싸우고 그랬지 . 나를 전담 마크하는 형사가 있었어 .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했지 . 어디 가서 뭐 하나 뭘 먹나 , 집 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이동하면 꼭 붙어 따라다녔지 .

전경들이 와서 밟으려고 전담 형사가 못 밟게 하고 그랬지 .” 정미옥·여태권 부부 고산이 퍽 마음에 들어 이곳에 뿌리를 내리다 여태권 목사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마치 호랑이 같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 지금의 그의 얼굴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의 흔적 .

여태권 목사님 스스로가 고백했다 . 어린 시절부터 싸움꾼이었다고 . “ 내가 성질이 급하고 거친 편이었어요 . 어렸을 때는 부모님 따라 경북 고령에서 익산으로 군산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 어린 시절 기억은 싸움한 거 밖에 없어 .

특히 남자아이들은 서열이 있으니까 자꾸 싸움을 시키고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해야 만 했지 . 20 대에서 30 대 까지 군산에 정착해서 나락 농사를 지었어요 . 부모님이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군산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 자연스럽게 교회가 내 삶을 엮어주는 중심지가 된 거지 .

사실 내가 신학공부를 안 했을 수도 있는데 청년 시절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 여섯 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하나 둘씩 다 떠나는 거야 . 공무원 , 은행원으로 . 마지막 친구가 신학대학을 가버리고 나 혼자만 남았어 . 외로워서 못 살겠는 거야 .

나도 어디로 가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학대학 갈 기회가 생긴 거여 . 80 년도에 한국신학대학을 가서 공부를 했거든 . 그 당시에는 모든 데모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어 . 시위 주동의 본거지야 , 거기가 . 쉽게 말해서 데모하는 연습을 하고 나온 거지 .

그렇게 율곡교회 오니까 고산이 또 유명한 곳이잖아요 .

소몰이 집회부터 시작해서 여기 오니까 만날 데모하더라고 , 아이고 잘 되었다 , 그래서 어울려 다니면서 정이 쌓인 거지 .” 이주하며 사는 삶에 대한 고단함을 알기에 고산에 오던 순간 이 곳이 퍽 마음에 들어 고산 땅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

은퇴 후 비교적 시간이 많아진 그는 봉실산 아래 815 농장이라는 작은 나무현판을 달고 소 스무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 . 자신의 가족이 먹을 만큼 농사짓고 농작물 부산물들을 알뜰히 모아 매일 쇠죽을 끓인다 . 버려지는 것 없이 순환하며 소박하게 사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혈기왕성하던 때는 이미 지나갔고 그의 얼굴은 순하다 . 한들한들 힘 빼고 일해야 오래 갈수 있는 법이다 . 가족이 먹을 만큼 농사짓고 농작물 부산물들을 알뜰히 모아 매일 쇠죽을 끓인다 . “ 지금은 내 시간과 체격에 맞게 일을 만드는 거지 . 그 외의 것이 생기면 가지치기 해요 .

그래서 크게 힘들진 않아요 . 이제 칠십 되었는데 일도 슬슬 해야지 . 젊을 때처럼 하면 쓰간 .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그 만큼만 하는 거 에요 . 거창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주어진 그 만큼의 일만 했어요 .” 지난 30 년 동안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

그는 그저 자신은 작은 지류이자 평범한 목회자였다고 말한다 . 하지만 큰 강도 작은 지류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그는 요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겪은 마을사람들과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

그 당시 시집장가 안 간 처녀 총각들은 젊은 목사 여태권과 함께 거리로 나섰고 모두가 고향을 떠날 때 진득하게 남아 마을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

젊은이들은 중년이 되어 완주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신의 일을 하고 , 칠순이 된 여태권 목사는 소 키우는 일이 이제 자신의 일이라고 말한다 . 여태권 목사는 봉실산 아래 자신의 농장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농사에 관심 있으면 어려워 말고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

뭘 해야 할지 모르고 고민만 하다가는 마음이 복잡해지기 마련 . 그럴 때일수록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 자연에 해를 입히지 않고 함께 사는 자연농법 . 그것이 보통의 농법인데 우리는 보통을 잊고 산다 . 그를 만나면 잊고 살았던 중요한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싸움꾼 목사님의 1987 사진 1

첨부자료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