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하는 힘 이순자 (42 년생 ) 할머니는 고산 토박이다 . 자포리에서 태어나 바로 옆 마을 상리로 시집을 왔으니 고산 소재지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 5 남매 중 위로 오빠가 둘 , 아래로 여동생 하나 , 남동생 하나가 있었고 어린 시절은 ‘ 시망시러운 아이 ’ 였다고 기억했다 .
시망시럽다는 말은 몹시 짓궂은 모양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다 . 큰 오빠는 점잖고 무서워서 잘 따르지 않았지만 둘째 오빠와 그 또래 남자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제법 성가시게 굴고 짓궂게 놀던 아이였다고 한다 . “ 그때는 자포리 근처가 다 논이었어 . 지금 고산 어린이집 있는 데가 우리가 놀던 논이었어 .
옛날에는 어른들이 논에다가 일부러 물을 대줬어 . 동네 애들 놀라고 . 그 논바닥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고 팽이치기도 하고 그렇게 놀았지 . 아직도 그때 놀던 때가 눈에 선해 . 언제 이렇게 나이가 먹었나 한심하지 . 우리 집은 가르칠 형편은 되었는데 여자들 교육을 안 시켰어 .
사흘을 굶었는데도 중학교를 안 보내주더라고 . 그러면 양장기술이라도 배울테니 기술학교를 보내주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해줘 . 여자가 많이 배우면 시집가서 오래 못 산다고 . 그래서 그냥 놀다가 나 열여섯 살 인가 그때 우리 윗집에 미장원이 생겼어 .
거기 놀러 다니며 왔다갔다 하니까 미장원 언니가 나보고 시다 ( 보조 ) 를 해달라고 하더라고 . 그 당시만 해도 미장원에 사람이 많으니까 일손이 부족하잖아 . 그때는 숯을 이용해서 불파마를 했어 .
그렇게 미장원에서 보조를 하다가 일찍 연애를 했지 .” 그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던 또래 친구 다섯이 있었다 . 후레시 ( 렌턴 ) 도 없던 시절이어서 호롱불을 들고 참외 서리하러 다니고 새벽이면 감 따러 다니며 그때도 제법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 그 시절에 아저씨를 만났다 .
그 아저씨는 다섯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할머니에게 눈깔사탕도 사주고 사이다도 사주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보였다고 한다 . “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상스럽게 우리 아저씨한테 끌리는 거야 . 우리 아저씨도 나한테 끌리고 . 그러다 봉게 밤이 되면 둘이 만나는 거야 .
저녁에 달이 밝으면 방천으로 돌아다니고 그랬지 .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안 보면 보고 싶어 . 나 사는 집 앞에 자포똘이 있었는데 우리 아저씨가 똘 건너 제재소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어 . 어느 날은 봉동에서 영화를 한다고 영화 보러 가자고 그러더라고 . 밤에 걸어갔지 .
그때는 차가 없으니까 . 영화 보고 그 밤에 집으로 걸어왔지 . 3 년을 그렇게 지났어도 내 손을 한 번 안 잡았는데 그 날은 나보고 집에서 자고 가라고 그러더라고 . 그 당시 내가 집에서 나와서 미장원에서 언니랑 지내고 있었거든 . 막 못 가게 혀 .
하루는 별일 없이 잠만 자고 갔는데 나중에는 서로 좋아하니까 일이 생긴 거지 . 그때가 9 월 무렵이었던 거 같아 . 무수가 당긋당긋 있을 때야 . 그때 우리가 밤에 걸어오면서 목이 마르니까 그걸 뽑아먹고 걸었지 .
그렇게 애가 먼저 들어선 거지 .”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좋아하던 아저씨를 만나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았으면 참 좋았으련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울다가 웃다가 두 시간을 보냈고 구술을 풀면서 또 울다가 웃다가 세 시간을 보냈다 . 영리하고 부지런했던 할머니의 친정아버지는 딸의 상황을 말없이 받아들이셨지만 , 어머니와 오빠들은 반대가 심했다 .
고산에서 책방하던 큰 오빠가 할머니를 앉혀놓고 정말 결혼을 할 거냐고 세 번을 묻고 기어이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 펑펑 울면서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 그렇게 19 살 되던 해 둥실하게 부른 배를 안고 시집을 갔다 . “ 나 산 거 생각하면 기가 막혀 .
시어머니랑 나랑 신랑이랑 셋이 살았어 . 처음 시집와서 살았던 곳이 여기 길가에 자전거포 있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오막살이를 했지 . 다행히 시어머니가 좋은 분이어서 시집살이라는 건 몰랐는데 배고픔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 . 그 배고픔이 참 서러웠지 .
우리 아저씨가 나름대로 일을 하긴 하는데 억척스럽지 못했어 . 지금도 우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 .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가면 나만 보면 밥을 먹으랴 . 두 시에 가나 열 시에 가나 밥 때도 아닌데 밥을 먹으랴 . 그럼 나는 거짓말로 밥 먹었다고 하지 .
그럼 아버지가 ‘ 아기 엄마는 애 젖 주고 나면 금방 배가 고파진다더라 . 그러니 먹어라 .’ 그런 소리를 늘 하셨어 . 아버지는 왜 나만 보면 밥만 먹으라고 그러는지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힌 소리였지 .
내가 궁핍하게 사는 것을 숨긴다고 숨기지만 아버지는 다 보이는 거지 .” 순자 할머니가 어린 시절 귀찮게 따라다니던 작은 오빠는 오두막집에 종종 찾아와 배곯지 말라며 쌀이고 돈이고 많이 보태줬다고 한다 . 친정식구들 덕에 매서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
술을 좋아하던 할아버지는 마흔이 넘어서야 마음을 잡고 일을 하셨다 . 동네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나 이집 저집 불려 다니며 농사일을 하니 그 덕에 살림살이도 조금씩 좋아졌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대추와 곶감으로도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다 .
할머니는 마흔일곱부터 12 년 동안 전주에 있는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을 했다 . “ 예전에는 대추장사 하면 돈 벌었어 . 그 당시 고산에는 대추나무가 별로 없으니까 대전 , 운주 , 화산에서 대추를 사서 강변에서 말렸어 . 멀리 강원도에서 대추 사러 사람들이 고산까지 찾아왔어 .
나는 오산리 강변에서 말렸어 . 벌건 대추를 강변에 널어놓았으니 참 장관이지 . 일하는 사람들도 또래에다가 여자 남자 섞여서 참 재밌게도 일했지 . 나중에는 공장으로 출퇴근을 했지 . 아저씨가 반대해서 일을 잘 못 나갔는데 월급봉투에 20 만원을 받아서 아저씨한테 보여줬지 .
첫 월급으로 구두를 맞춰줬는데 그 뒤부터는 일을 나가게 해주더라고 .” 할아버지는 17 년 전 일흔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 폐병으로 고생하시던 시절에도 대전사는 아들이 아버지를 모셔가 병원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 병원비에 보태라고 자녀들이 돈을 주는데도 순자할머니는 받을 수 없었다 .
가난 때문에 일찍 집에서 떠나보냈다 . 그들이 도시로 떠나 공장에서 번 돈을 차마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 잘 커 준 자녀들에게 늘 고맙다고 한다 . “ 애들이 나한테 봉투에 돈을 넣어서 준다고 해도 나는 안 받았어 .
애들이 삐직삐직 울면서 엄마는 어째서 우리 돈을 이렇게 안 받으려고 하냐고 그랬지 . 근데 지금은 받아 . 주면 받지 ~” 순자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월급봉투를 아마 한참동안 어루만졌을 것이다 .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었던 그 세월이 할머니를 살게 했다 .
시망스러웠던 어린 순자는 고산 부녀 경로당의 회장이 되었다 . 나의 오랜 산책길에서 만난 고산의 할머니들이 경로당에 다 모여 계신다 . 함께 밥을 해먹고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지금의 순자 할머니를 살게 하지 않을까 !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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