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오산 마을 전현숙씨 이야기 고산면 안수산 아래 성재리를 찾아간 늦봄 , 그이의 텃밭은 벌써부터 풍성해지고 있었다 . 상추와 쪽파는 먹기 좋게 자라 있었고 , 고추와 오이 모종은 여름 햇살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
마당에는 곧 논으로 들어갈 초록으로 빽빽한 모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 현관문 앞 작은 정원에는 빨간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 마을 사람들은 그이를 중국댁이라고 부른다 .
중국댁 전현숙씨 (66 세 ) 가 고산면 안수산 아래 성재리에 살기 시작한 것이 2007 년부터니까 그새 14 년이 흘렀다 . 중국 연변 화룡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완주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녀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도 몇 번이나 울었다 . 국경과 사경을 넘나든 그녀의 삶은 언제나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때때로 참기 힘든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 안수산 아래 전현숙씨의 집. 동네 할머니와 함께 농사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결혼 전에는 친정이 잘 살았어요 . 우리 아버지가 화룡시의 시장이었어요 . 아버지 손잡고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다 경례를 하며 지나갔던 기억이 나요 . 59 살 이른 나이에 뇌출혈로 돌아가셨죠 . 아버지 돌아가시고 시골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한동네 결혼을 했어요 .
막상 시집을 갔는데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 시어머니 드센 성격 탓에 나까지 해서 며느리 다섯 명이랑 다 싸웠어요 . 며느리들이 다 못 산다고 나가 살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넷째 며느리인 나랑 같이 살았죠 . 내 성격이 참 화통해요 .
그러니까 예전 시어머니가 나한테 못되게 그랬어도 세월이 흘러서 다 잊어버린 거지 . 그 당시 아이아빠가 서른 살부터 아파서 누워있었어요 . 17 년을 누워있다 47 살에 돌아가셨어요 .” 그녀는 병원비와 아이의 학비 ,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
목재공장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치원에서 우리 돈으로 한 달에 8 만원을 받아가며 일을 시작했지만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 망설임 없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장사를 시작했다 .
공부를 잘 하던 아들 뒷바라지는 할 만 했지만 오랜 동안 병으로 누워있던 아이아빠는 고생한 보람도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 “ 반찬 장사를 시작했어요 . 새벽에 일어나서 도라지를 칼로 쪼개고 물기를 쫙 짜서 고추장 양념을 한 반찬을 만들었어요 .
그거를 봉지에 하나씩 포장에서 팔았어요 . 이 반찬은 지금도 중국에서 유행하는 반찬이에요 . 나 혼자 집에서 만들고 봉지에 넣어서 포장했어요 . 그래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하루 이천 개도 넘게 팔았어요 . 마른 명태에다 고추장 양념 무친 것도 반찬으로 팔고 .
유치원 선생님 할 때는 한 달에 오백 원 벌었는데 반찬 팔아서 삼천 원 벌었어요 . 아들 학교 들어갈 때 되면 또 병원비로 목돈 들어갈 일이 생기고 . 아들이 대학을 붙었는데 북경대 들어갈 점수였는데도 돈이 드니까 학비가 좀 적은 연변 고려대를 들어갔죠 .
거기 있어도 못 살고 나가도 못 살 거면 나가서 돈이라도 벌 생각으로 내가 2001 년에 한국으로 나왔고 우리 아저씨가 2002 년에 돌아가셨어요 . 그리고 아들도 한국 고려대로 옮겨서 한국으로 나오게 됐죠 .” 읍내 일보러 다닐 때 늘 타고 다니는 자전거.
그녀는 서울 동대문 운동장 근처 신당동에 자리를 잡고 식당 배달 일을 시작했다 . 아침부터 백반 여덟 상을 겹쳐서 머리에 이고 12 시간 동안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녔고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야채곱창 볶는 일을 6 년 반 동안이나 했다 .
하루에 10 만원 정도를 벌었고 한 평 정도 되는 고시원 쪽방을 같은 중국동포와 함께 살면서 아끼고 아껴서 6 년 만에 1 억을 모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의 전쟁 같은 노동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 “ 그때는 동대문에서 비집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정말 사람이 많았어요 .
백반 담은 쟁반을 머리 위로 8 층까지 쌓고 배달을 다니는데 손이 안 닿잖아요 . 보자기를 위로 감아서 쥐고 손에 쥔 전표 보면서 배달 할 곳 확인하고 그랬어요 . 12 시간을 그렇게 일하고 퇴근하면서 포장마차에서 한창 바쁜 시간에 야채곱창 볶는 일을 했어요 . 정말 안 먹고 안 썼어요 .
오백 원짜리 우유하나도 아까워서 안 사먹고 그랬어요 . 고시원에는 다행히도 항시 쌀밥이 밥솥에 있었거든요 . 그러니까 식당일 하고 퇴근할 때 김치 한 주먹 비닐봉지에 넣어 와서는 밥이랑 먹었었죠 . 그렇게 살았어요 .” 고된 노동과 각박한 생활은 결국 그녀를 병들게 했다 .
먼저 그녀의 팔에 문제가 생겼다 . 힘을 쓸 수 없이 아팠다 . 일하던 식당에서 월급을 두 배로 올려준다고 해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 그때 지인의 소개로 완주에서 농사짓던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완주살이가 시작됐다 .
서울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았고 살기 위해 완주에 자리를 잡았고 서울에서 배운 기술로 읍내에 곱창집을 차리기도 했다 . 하지만 새로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
“ 아들이 일본말로 최고로 맛있다는 뜻으로 이찌방 곱창집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는데 한 달쯤 일하다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갔더니 간암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 그날 저녁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생각나서 막 눈물이 쏟아졌어요 .
나는 이때까지 참 착하게 산 거 같은데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왔나 그런 생각이 나서 밤새 울었어요 . 그래도 다음날 훌훌 털고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읍내 노래방을 갔어요 . 나 노래 잘해요 . 나 혼자 노래를 썩어지게 불렀어요 . 그러니까 몸이 가벼워지더라고 .
그때 내가 안 죽을 거란 확신이 들더라고요 . 서울에서 더 이상 일 못하고 아팠을 때 그냥 고향인 연변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여기 완주로 와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한 번도 와 본적도 없는 완주를 그렇게 오게 된 거지요 .” 1 년 가까운 항암치료를 견뎌냈고 현숙씨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사이 동네 사람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이는 씩씩했다 .
공부 잘하고 착하던 아들은 박사학위도 받고 일본에 있는 게임회사에서 돈 잘 벌고 손자도 둘을 뒀다 . 손재주 많고 눈썰미 좋은 중국댁 현숙씨는 연변에 살 때도 서울에 살 때도 지금 이곳 성재리에서도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
어르신 할인을 몰라 비싼 핸드폰 요금제를 쓰는 분들을 위해 전화 한통으로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 TV 리모콘을 잘못 조작해서 나오지 않는 TV 를 다시 켜드리는 일은 그이의 몫이다 . 일 년에 한 번 이십일씩 중국을 다녀오느라 마을을 비우면 어르신들이 중국댁을 찾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고 한다 .
현숙씨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 고산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수업 초창기 수강생이었던 그이는 ‘ 동네한바퀴 ’ 로 불린다 . 늘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고 스스로 보조강사 역할을 하며 컴퓨터 앞에서 헤매는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드리는 친절한 사람 .
코로나로 인해 오랜 기간 휴강이었고 기다리던 컴퓨터 수업이 곧 시작 된다 .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 신사동 그 사람 ’ 을 흥얼거린다면 그 사람이 바로 친절한 전현숙씨일 것이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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