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_ 옥선할머니와 복덩이, 가지고 가라며 텃밭의 작물들을 서둘러 갈무리하시는 옥선 할머니와 할머니 밭에서 나고 자란 것들. 헛소리에는 옳은 소리로 말대답을 해야 하는 법 두억마을 강옥선 할머니 이야기 강옥선 할머니집 앞마당 텃밭에는 아기배추가 자라고 있다 .
아기 배추들 옆으로는 고추 , 부추 , 가지들이 줄 지어 있는데 어린 배추들 한 가운데 붉은 꽃무릇 한 송이가 홀로 피어있다 . 할머니가 심은 거냐고 물으니 모르겠다 하신다 .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르지만 꽃이 고와서 뽑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이라 한다 . 초록 배추들 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꽃이다 .
할머니는 13 살에 일본 오사카에서 날아와 이곳 두억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여전히 환하고 생생하게 피어있다 . 할머니의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때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보통사람이었다 . 가족이 일본 오사카에 이주한 뒤 , 1934 년에 할머니가 태어났다 .
“ 저녁에 자려고 누어서 기와집을 지었다 부셨다 함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부터 산 삶을 생각하는 거지 . 말하자면 하나부터 쌓아 올려가며 기와집을 짓듯이 생각을 쌓는 다는 거야 . 겁나게 오래 살긴 했는데 좋은 세상은 못 살아 본거 같아 . 지금이야 아들 딸 여위고 편하지 .
딸들이 다섯인데 나에게 참 잘해 . 이게 행복인가 , 호강인가 싶다가도 허무하지 .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 우리는 앞으로 죽을 일만 바라보고 살잖아 . 그러니까 참 허무하기도 해 .” 일등은 가질 수 있어도 반장은 가질 수 없었어 .
할머니의 아버지는 아들 , 딸 차별 없이 자식들을 퍽이나 아끼셨다고 한다 . 어린 시절부터 영리하다고 소문이 나서 딸자식이어도 공부만 계속 하겠다 하면 동경으로 유학을 보낼 테니 덮어 놓고 공부만 하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
“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올 때도 나는 가르칠 것 없이 영리하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어 . 공부를 잘 해서 반장을 하고도 남았어 . 일등을 하고 반에서 주동역할을 해도 반장은 안줬어 .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
내가 12 살 먹었을 때 어느 날 , 일본애하고 나하고 말짓을 해서 선생님한테 불려가서 혼이 났어 . 그때 내 일본이름이 하라모도였는데 선생님이 일본애한테만 그러시더라고 .
‘ 하라모도 상은 일본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지만 너는 일본인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 그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딱 상하더라고 . 도무지 학교를 갈 수가 없어 . 차별한 거잖아 . 나는 눈치가 빨라서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듣고는 다시 학교를 돌아갈 수 없었어 .
그렇게 12 살 중간에 학교를 안 갔고 다음 해 13 살 때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왔지 . 시국을 잘 못 만났지 . 좋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배움의 끝이 없이 배웠을 테지 .” 해방이 된 후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
다행히 주변의 좋은 이웃들이 보살펴 줄 테니 돌아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한국인들에게 보복하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계속 머물 수 없었다 . 어려운 시국이었다 . 13 살 되던 해에 고모가 살고 있는 경상남도 함양으로 온 가족이 돌아왔지만 그곳에서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
그까짓 소문이 밥먹여 주나요 그의 아버지가 먹고 살 길 찾아 떠돌다 찾아낸 일이 산판일이었다 . 그렇게 김제 금산사 근처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 먹고 살 일이 급하니 배움을 이어나갈 순 없었지만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산다는 아버지 말에 그는 누에를 쳐서 길쌈하고 베짜는 일을 배웠다 .
그럭저럭 살다보니 17 살이 되었고 그 해에 6.25 전쟁이 터졌다 . 남자들은 다 잡혀가고 여자들만 마을에 남았다 . 귀하게 키운 딸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안동김씨 집성촌인 김제 동곡마을로 급하게 시집을 보냈다 .
18 살에 시집와서 석 달도 못 채우고 남편은 징집되어 7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 “ 나하고 시어머니랑 둘이 그 세월을 산거지 . 어느 날은 마을 반장이 추렴 ( 모임 , 놀이 , 잔치 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럿이 얼마씩 돈이나 물건 등을 나누어 내거나 거둠 ) 을 내라네 .
여자들 둘이 사는데 무슨 돈이 있어 추렴을 내냐고 소리를 지르니까 반장이 장부를 탁 내려놓으면서 ‘ 당신이 그럼 반장 하시오 !’ 그러네 .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는데 통도 크지 . 나중에 반장이 면서기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어 .
내가 문을 활짝 열어놓고 큰 소리로 ‘ 여자 둘만 살고 남편은 군대로 끌고 갔는데 돈 되는 거 있으면 다 가져가시오 ’ 큰 소리를 치니까 다 큰 남자들이 쩔쩔 매 . 대통령이라도 데려오라고 그랬어 . 나는 하나도 겁 안 난다고 . 여자 둘만 있으니까 별일이 다 있었어 .
수리조합 때문에 물을 막으면서 우리 집이 잠기게 되어서 집값으로 그때 돈 2 만원을 받아두었지 . 안동김씨 대부라는 사람이 와서는 선산에 비석을 세워야 하는데 그 돈을 내놓으라는 거야 .
내가 절대 그 돈에는 손 못 댄다고 말대답을 하니까 그 양반네들이 어디서 저런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왔냐며 펄쩍펄쩍 뛰어 . 시어머니도 집구석 망해먹을 여자라 통머리만 커서 뭐시고 일만 벌인다고 뭐라고 했지만 나는 기가 안 죽어 .
베 짜서 번 돈으로 돼지랑 닭을 키우면서 살림이 나아지니까 뒤에서 험담하던 동네 사람들도 똑똑한 며느리 참 잘 들어왔다는 말을 했지 .” 그의 나이 스무 살 . 마을에서 최초로 쪽진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하고 나타났을 때도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
안 좋은 소문이 나돈다고 시어머니는 걱정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큰 소리 쳤다 . “ 내 머리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잘못입니까 ! 소문내려면 내시오 . 소문이 밥 먹여 주나 !” 이 대목에서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지켜내고 스스로 삶을 살아낸 사람에게 보내는 갈채였다 . 군대에서 돌아온 남편과 시어머니 , 돌 지난 첫째 딸을 데리고 시아재가 살고 있는 두억마을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도 그는 서울로 가길 원했다 .
그 당시 시골 형편은 어딜 가나 힘들었을 테고 서울로 가면 장사라도 해서 집안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 시어머니는 어떻게든 설득이 됐지만 남편은 굳건했다 . 먹고 살기 위해 나섰던 그 길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
할머니는 울근 감 두 접을 머리에 이고 두억마을에서 초포다리까지 걸어가던 그 길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 전주 중앙시장 , 모래네 시장 , 덕진공원에서 수줍게 감을 팔던 새색시는 사납고 억척스러워야 했다 .
자식들 대학등록금을 벌기 위해 쉰 살 무렵에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청량리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중곡동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반찬을 팔았다 .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봤다는 말이 그 세월을 대신을 할 수 있을까 ?
꽃피는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낯선 곳에서 버스를 타고 장사 하러 돌아다닐 때 , 울긋불긋 고운 옷을 입고 봄소풍 가는 사람들을 보고 서럽게 울던 그 울음은 왜 지금도 그리 생생한지 모르겠다 하신다 .
명랑하고 똑똑하던 어린 옥선 , 허튼 소리에는 눈 똑바로 뜨고 옳은 소리로 맞받아치던 열아홉 옥선 , 자식들 호미자루 쥐는 것이 싫어 돈 벌러 도시로 떠났던 쉰 살의 옥선 . 이 모든 옥선을 기억하기 위해 강옥선 할머니는 오늘 저녁에도 세월의 기와집을 지었다 부셨다 하실 테다 .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