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리 단지동 앞멀에 둠벙을 파놓은 이유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는 조선의 문신 이서구가 전라감찰사 시절 산중 오지인 이곳에 장차 물이 가득 찰 것이라고 예언하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 실제로 1966 년에 댐을 막고 동상저수지에 물이 들어차면서 수만리라는 이름의 예언이 들어맞게 됐다 .
전주에서 소양 방향으로 들어가도 송광사 , 위봉사 , 입석마을을 지나야 하고 고산에서 들어가도 소향리 , 대아수목원을 지나 동상면 소재지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 위봉사 방향으로 이어진 음수교를 건너가야 수만리 단지동 앞멀에 사는 이진영씨 (50 세 ) 를 만날 수 있었다 .
그야말로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 “ 수만리는 제 고향입니다 . 대아댐이 생기면서 일차적으로 마을이 잠겼어요 . 그때 우리는 저수지 윗동네였죠 . 큰 동네였어요 . 그런데 나중에 우리 동네마저도 수몰되면서 일부는 군산으로 가고 나머지는 단지동 , 학동 , 입석 , 다자 같은 근처 마을로 들어갔어요 .
2004 년에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고산장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어요 . 초등학교는 동광초등학교를 나왔어요 . 동상 , 동광 , 동공 , 은천 쪽에도 하나 있었고 그때는 리마다 학교가 하나씩 있었죠 .
계속 도시로 나가면서 학교들이 다 없어졌어요 .” 지금은 자동차도 있고 또 동네까지 마을버스도 들어오지만 , 가까운 입석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것도 20 년 전이고 그 전에는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소양면 오성리까지 나가야 전주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
그마저도 세 시간에 한 대씩이라 버스를 놓치면 송광사까지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 “ 이 동네가 물이 좋아요 . 학교 일찍 끝나면 집에 안 들어가고 매일 밖에서 놀았어요 . 집에 와도 할 일이 없거든요 . 농사를 많이 짓는 것도 아니어서 애들이 도울 일이 많지 않았어요 .
겨울에는 눈썰매 타고 놀았죠 . 동네에 둠벙이 있는데 둠벙 위를 막아서 아래쪽 물을 다 퍼내요 . 그렇게 물고기 잡아서 불 피워서 구워 먹고 , 개구리 잡고 , 올무로 토끼 잡아서 먹고 그랬죠 .”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고산을 오가는 나룻배 이야기로 이어졌다 .
마을 사람들은 고산 6 개면의 물산이 모이는 고산장을 가기 위해 하루 대여섯 번 다녔던 나룻배를 이용했고 배삯은 해마다 한 번씩 쌀이나 돈으로 모아서 줬다고 한다 . 진영씨는 어머님 고향이 고산면 성재리여서 명절이면 이 배를 타고 외가에 다녀왔다고 했다 .
“ 버스 시간에 맞춰서 오가는 배여서 정해진 시간에만 운영했어요 . 9 시 , 12 시 , 3 시 , 6 시 , 7 시 이런 식으로 여섯 번 정도 버스가 있었거든요 . 어렸을 때는 나무배였고 나중에 모터 달린 배로 바뀌었죠 . 나무배였을 때는 노를 저었어요 . 외노라고 일자 노가 있었어요 .
중학교 들어가면 어른들이 가끔 노 저어보라고 시켜요 . ‘ 바위와 풍경 ’ 카페 아래쪽 근처가 선착장인데 저수지 막은 댐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어요 . 30 분은 가야 해요 . 배 출발할 시간 되면 경운기나 소달구지에 물건 싣고 선착장으로 모이는 거죠 .
배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해서 그거 못타면 무조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 겨울에 얼음 많이 얼었을 때는 나무망치로 깨서 뱃길을 어느 정도 만들면서 다니기도 했고 아예 얼어서 60 센티 이상 두께로 얼면 그 길을 육로처럼 왔다 갔다 했죠 . 경운기도 다니고요 .
배가 새로 바뀔 때마다 고사도 지냈어요 . 그 시절을 기억하던 분들은 많이 돌아가시고 그 시절을 기억하고 목격했던 이들만 남아 있는 거죠 .” 이진영씨는 중학교 때부터 나가 살다가 20 년 전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다시 고향 마을 단지동으로 돌아왔다 .
감 농사와 표고 농사를 짓던 아버님의 건강이 나빠지신 게 이유였지만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에서의 추억과 그리움이 어쩌면 그를 다시 고향 마을로 불러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 “ 예전에는 감 일 할 때 되면 고산에서 일손 도우러 많이 넘어오셨어요 .
스무 명씩 우리 집에서 2 주간 숙식하면서 일했죠 . 지게 지고 산에 올라가서 한 바작 따고 와서 점심 먹고 오후에 한 바작 따고 그랬죠 . 사람이 지게 지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서 감을 따서 내려와야 하니까 힘든 일이었어요 . 골짜기에 물이 모이는 곳 주변으로 감나무를 심었던 거죠 .
그러니 수확하는 게 힘들었죠 . 그때 남자들이 감 따는 일을 하고 감 다듬는 일을 여자들이 하고 그랬죠 . 저 산 8 부 능선 골짜기에 감나무가 있거든요 . 어머니가 고산 성재리가 고향이세요 . 거기 분이 산을 넘어 우리 집에 오셔서 감 따고 감 깎는 일을 하셨어요 .
골짜기 넘어오면 한 시간 반 걸려요 . 그렇게 걸어오시든지 버스 타고 배 타고 들어오시든지 그랬죠 .” 진영 씨의 지인 김유녀 씨가 운영하고 있는 연리지 다원 . 튀르키예 전통 카페트와 소품들이 이색적인 곳이다 . 튀르키예 홍차 , 튀르키예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 .
북스테이 아래층 여러명이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눌수 있는 공간 , 수만교에서 바라본 풍경 . 오른쪽 물가에 선착장 흔적이 남아있다 . 십여 년전 전통술교육을 통해 만난 지인들과 ‘ 공동체공간 수작 ’ 을 만들고 올해 양조장 인허가도 완료했다 . 순곡주 빚을 때 필요한 누룩을 법제 중이다 .
이진영씨는 전주에서 인테리어 목수로 일했고 그때 ‘ 망치 ’ 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다 .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그에게 이장 일이 맡겨지기도 했다 . 2012 년에 아는 목사님 소개로 서울사람이었던 아내와 만나 결혼을 했다 .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지만 , 귀촌을 꿈꾸던 아내를 만나 지금 살고 있는 터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벌여 나갔다 . 이진영씨는 그런 일을 ‘ 둠벙 ’ 을 파는 것에 비유했다 . 거점공간이라고 부르는 그의 ‘ 둠벙 ’ 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 “ 처음에는 서예전시관을 만들었어요 .
그러다 2 층에 민박집을 지었죠 . 동네 어른들 5 명 모아서 공동출자해서 지었어요 . 민박 손님들 조금씩 받고 있고 완주문화재단 예술가 한 달 살기 프로젝트도 참여하고요 . 사람이 오려면 놀거리와 만날 장소가 있어야 해요 . 수만리에는 그런 거점공간이 없었어요 . 나랑 놀아줄 사람 여기 모여라 .
말하자면 둠벙을 파야 하는 거죠 .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요 . 친구 하나가 올해 이사 오기로 했고 , 2 년 전에 김유녀 누님이 들어오셔서 카페 운영하시고 올해 관광두레 선정되었고 양조장 인허가도 끝났어요 .
카페 이름은 연리지 다원 , 2 층은 북스테이 동상 , 공동체공간 수작은 양조장 , 햇살공방은 목공소 . 이제 놀이터가 만들어졌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이진영씨는 인터뷰 말미에 녹색평론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 어부가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미국인이 당신은 왜 물고기를 많이 잡지 않느냐고 물었다 . 어부가 대답했다 .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하냐고 . 미국인이 말했다 . 큰 배도 사고 성공해서 노후에 편안하게 살면 좋지 않냐고 . 그러니까 어부가 대답했다 . 지금 편하게 살고 있다고 .
이진영씨는 그 편안하고 좋은 삶을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꾸려가고 싶다고 했다 . 물과 바위산 풍경을 보느라 빠르게 지나쳤을 그 길 . 잠시 옆길로 새보자 . 누군가가 10 년의 계획으로 정성스럽고 집요하게 만들어낸 놀이터이자 ‘ 둠벙 ’ 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잠시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셔도 좋을 테고 공기 좋은 곳에서 정성스럽게 빚어낸 순곡주 한잔 하며 하룻밤 자고 가도 좋을 곳이다 . 그러다가 둠벙에 풍덩 빠져 그들의 이웃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 오래 전 나룻배를 타고 이동하던 수만리 사람들.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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