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리에 담은 여든 셋의 인생 덕암마을 유옥순 광주리 할머니 지천에 널린 싸리나무 늦가을에 베어서 갈무리해두면 1년 내내 광아리, 채반으로 변신 고산장에 내다 팔려고 호롱불 친구삼아 밤 11시까지 몸살 여름에도 싸리나무 마를가 문닫고 만들다 담으로 멱을 감았을 지경 장에 나가기만 하면 순식간에 죄다 팔렸을 정도 공궁하던 그 시절 광아리 팔아 힘 펴고 살았지 정갈한 집.
새로 지은 집과 100년도 더 된 행랑채. 삼례 와리 넓은 들판에서 태어나 고산 남봉리 덕암마을로 스물 둘에 시집 온 올해 여든 셋의 유옥순 할머니는 수도꼭지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고 세탁기가 빨래를 돌리고 TV 앞에 앉으면 아무 때고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지금 시절이 꿈만 같다 .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지나온 삶은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버렸지만 할머니가 수도 없이 엮어낸 싸리나무 광주리 ( 덕암마을 어르신들은 광주리를 꽝아리라고 부른다 ) 처럼 할머니의 지나온 삶은 짱짱하고 애틋했다 . 오래된 낡은 집을 부수고 새로 지은 집에 살고 계시지만 그 옆 행랑채는 옛 모습 그대로다 .
이십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두가 안나 집을 부수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고 있다는 행랑채 앞에서 할머니는 광주리 짜서 살아온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주셨다 . “ 시집와서 봉게 시어른들이 죄다 광주리를 만들더라고 . 나는 뭘 알들 했간이 . 삼례에서 태어나서 여기 산골 와서 산 것이 다여 .
시부모님 밑에서 꽝아리 일 거들다가 분가해서는 억시게 만들었지 . 돈을 벌어야 하니까 . 징글징글하게 했어 . 그것 만들어서 돈 모이면 논 다랑이 쪼그만거 사고 . 몸땡이는 골았어도 꽝아리 만들어서 좀 핀 거야 . 시골에서 뭐 돈 나올디가 있었간디 .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은 싸리나무 꽝아리로 힘 좀 폈어 . 그 전에는 참 곤란하게 살았지 . 우리 집 양반은 동상면 단지동까지 지게이고 걸어가서 싸리나무 해오고 그랬어 . 이제 좀 살만하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네 . 그 양반이 67 세에 돌아가셨지 . 나는 63 세에 혼자되었고 .
그래도 자식 다 여위고 돌아가셨어 . 막내딸 봄에 시집보내고 그 해 7 월에 돌아가셨어 .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제 살만하니까 돌아가셨어 .” 이 동네 사람들은 죄다 꽝아리로 힘 폈어 큰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덕암마을은 고산의 끄트머리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
곤궁하던 시절이었으니 집집마다 사정은 비슷했다 . 지천에 널린 싸리나무가 그들의 삶 속에 들어왔다 . 덕암마을 사람들 중에 광주리 안 만들어 본 사람은 없다고 마을 어르신들마다 말씀하셨다 . 먹고 살 것 없던 시절이었지만 , 그래도 광주리 만들어 팔아 힘 좀 펴고 살았다고 한다 .
광주리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허리가 돌아가고 육천마디가 쑤신다는 할머니 . 이제는 쳐다보기 싫다며 낡고 오래된 것들을 다 버리셨다 . 그래도 할머니 집에는 채반 두 개와 반짇광아리 하나가 남아있다 . 채반은 30 년이 넘도록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
삶은 나물 널어 말릴 때도 좋고 명절 때 노릇하게 부쳐낸 전을 올려두면 고실고실하게 잘 식는다 . 시아버지가 시집올 때 만들어주신 반짇광아리 가벼운 프라스틱 채반도 써봤지만 이 광주리 채반만 못하다고 하신다 .
반짇광아리는 광주리보다 작은 크기로 할머니 시집왔을 때 시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 그곳에 바늘이며 실 , 가위를 넣어두고 식구들 옷 해 입히고 이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 60 년도 넘은 반짇광아리는 새아기 주려고 만들었던 것이라서 그런지 여전히 수줍고 예뻤다 .
할머니에게 광주리 다시 만드실 수 있겠냐고 넌지시 물으니 손사래를 치신다 . 그래도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 하실 때는 오늘 아침에도 만들다 나온 사람처럼 말들이 생생하다 . “ 꽝아리는 큰 것이여 . 요즘 쓰는 다라이 같은 거지 . 김장할 때 김치 거리도 씻어서 건져놓고 물 뺄 때 쓰고 .
논밭일 할 때 새참거리 내갈 때 꽝아리에 밥 담아서 머리에 이고 내가기도 하고 . 지천에 널린 싸리나무로 만들었어 . 싸리나무는 늦가을에 비어서 삶아 놓고 비 안 맞는데다가 보관해놓으면 일 년 내내 만들 수 있어 . 일단 싸리나무 잔가지를 싹 잘라 .
그럼 크기대로 큰 놈 , 작은 놈을 나눠서 한 단씩 묶어 . 이제 그걸 삶아 . 도라무통에다가 싸리나무를 쟁이고 물을 한 가득 부어서 불을 하루 종일 떼 . 익어서 동그라져 . 그럼 푹 익은 싸리나무를 건져내서 매갱이 ( 방망이 ) 로 또 두드린단 말이여 . 막 두드리면 나무가 막 능갈라져 .
그럼 손으로 껍데기를 벗기는 거야 . 껍데기는 땔감하고 알맹이는 이제 널어서 말려야 해 . 말려서 햇빛 안 드는 곳에다가 저장해놓고 그때그때 꺼내서 만드는 거야 . 그걸 또 깎아야 해 . 자잘한 놈들은 개려내서 바닥을 짜는 거고 굵은 놈은 날을 질러서 만드는 거지 . 그렇게 만든 것을 한 죽씩 놓아 .
한 죽이 열 개거든 . 석 죽 반을 해야 그것이 한 동가리야 . 한 동가리는 서른다섯 개지 . 한 동가리를 지게에 메서 장에 팔아야 하니까 그 놈을 내외간에 앉아서 짱짱하게 묶어 . 여자들은 힘이 없잖아 . 그것을 세 동가리씩 착착착 포개가지고 묶느라 내 엉덩이가 다 틀어졌어 .
한 동가리 합쳐놓으면 어른 키보다 크니까 짱짱하게 묶어야 혀 . 그것이 여간 대간혀 . 남자가 지게에 짊어지고 고산장날 나가서 파는 거지 . 장날마다 세 동가리씩 만들어서 나갔어 .” 밑장 만드는 과정을 설명 중이다.
그 시절 광주리 하나를 엮어서 팔면 얼마를 받았는지 궁금했지만 할머니는 알 수가 없었다 . 만드는 것은 같이 만들어도 장날 내다 파는 것은 아저씨들 소관이었으니까 . 아저씨들은 장날 광주리 팔고 손에 쥔 돈으로 주막이란 주막은 다 들러서 막걸리 마시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
그래도 그렇게 번 돈으로 작은 논도 사고 자식들도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먹고 살았다고 하니 내게는 할머니의 광주리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 몸이 기억하는 말들 할머니가 들려준 광주리 만드는 이야기는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처럼 충실하고 아름다웠다 .
곧 끝날 것 같아 아쉬웠던 광주리 이야기는 몇 장의 사진과 몇 컷의 영상으로 다시 이어졌다 . 행랑채 앞에서 채반과 반짇광아리와 함께. 예전에 이 방안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광아리를 만들었다. “ 남자들은 밑장을 만들고 나는 날을 질러주는 걸 했지 .
그럼 질러준 날 대로 힘 좋은 바깥양반이 싸리를 우겨서 엮어 만드는 거야 . 손이 몇 백번은 가야 만들어 지는 거야 . 매일 밤 열 한 시까지 호롱불 피워놓고 만들었지 . 이거 만드는 것은 모여서 못해 . 여럿이 모여서 하면 재미있기라도 하지 . 방도 좁으니까 딱 둘이 들어가면 꽉 차 .
사람 꼴을 못 봐 . 싸리나무가 마르면 억세지거든 . 그러니까 여름에도 방에서 문 딱 쳐 닫고 해야 혀 . 땀으로 멱을 감으면서 만드는 거야 . 그 좁은 방에서 꽝아리 만들면서 돈 벌 생각만 했지 . 닷새 만에 세 동가리 (105 개 ) 를 만들지 . 오일동안 만들라면 잠을 못자 .
그래도 가져가기만하면 죄다 다 팔렸어 .” 광주리 한 동가리를 지게에 진 동네 남자들이 냇가 돌다리를 건너 고산 장날로 향하던 그 뒷모습은 진풍경이었을 테다 . 남자들이 광주리 팔러 간 사이 동네 아낙들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 광주리 만드느라 살피지 못한 집안일을 하고 밭일을 한다 .
돌도 안 지난 아기를 밭 두덩에 눕혀놓고 일하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 몇 천원이면 플라스틱으로 만든 다라이 , 소쿠리 , 채반을 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나는 그저 할머니가 몸으로 기억하는 말들을 기록한다 .
한 죽 , 한 동가리 , 메갱이 , 동그라진다 , 능갈라진다 , 고롭싸리 ( 조록싸리 ) 등 할머니는 내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들로 광주리를 엮어 냈다 . 그 말들은 광주리 만들던 시어른의 어깨너머에서 유옥순 할머니에게 온 것이다 .
누군가의 너머 너머에서부터 흘러온 몸의 말들이 끊기지 않기를 . 유옥순 할머니의 광주리 예찬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할아버지가 쓰셨던 지게. 고산장날 광주리 나르던 지게였다. 마당한 켠에는 할머니의 비밀정원이 있다. 금낭화, 작약이 한창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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