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 - 고산 서봉마을 오진숙 씨 이야기 오진숙 씨는 고산 서봉마을 사는 양미라 씨의 엄마다 . 엄마이기 이전에는 손재주 좋은 아가씨였다 . 고산초등학교 앞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손재주가 좋아 수예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
어린 시절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을 금세 익혀 자신의 손으로 작고 예쁜 것들을 만들어 내던 진숙 (56 년생 ) 씨 였다 . 경천 원용복마을로 시집와서 살적에는 그 동네에 뜨개질을 처음으로 전파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 진숙 씨에게 뜨개질을 배운 동네 아낙들은 소일거리 삼아 뜨개질부업을 하기도 했다 .
손의 기억들은 잊히지 않고 그의 삶과 늘 함께 했다 . 잠이 오지 않는 밤 , 작은 방에 앉아 늘 함께 했던 코바늘 , 대바늘 때문에 손가락 마디가 움푹 패어버렸다 . 눈도 침침하고 손목도 아프니 손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 졸업했다던 진숙 씨는 오랜만에 자신 앞에 놓인 털실과 바늘을 한참 바라본다 .
이내 춤추듯 유연하게 , 그리고 능숙하게 빠른 손동작 사이로 편물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오종종 피어나는 꽃도 만들어 낸다 . “ 오랜 만에 해보는데도 기억이 나네 .” 뜨개질 좋아하던 ㄱ어린 시절 오진숙 씨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키우고 먹여 살리셨다고 한다 .
진숙 씨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혼자 농사짓고 사셨는데도 늘 정갈하게 한복입고 머리 기름 발라 비녀를 꽂고 다니셨다고 한다 . 전주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던 언니 오빠들이 어머니 혼자 고생하신다고 곁으로 모셨다 . 진숙 씨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전주로 떠나게 되었다 .
전주 병무청 윗동네에 살던 진숙 씨는 17 살 되던 해에 근처 동부시장에 있던 양장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1 년 정도 배웠다 . 20 살 시집가기 전까지는 뜨개질 공장에서 일거리를 받아와 집에서 열심히 뜨개질을 했다 .
1970 년 ~80 년대 섬유수출 증대와 함께 도시 외곽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메리야스 공장이나 요꼬 ( 니트 편직 )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도 늘어났다 . “ 스웨터 공장인데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어요 . 아이보리 색으로 스웨터를 떠서 가져가면 그걸 염색해서 수출한다고 하더라고요 .
실이랑 도면을 주면 그걸 가지고 가서 집에서 짜가지고 다시 공장으로 가져다주면 일당을 받은 거죠 . 도면 보고 짜는 거죠 . 회사에 뜨개질 잘하는 여사님이 있는데 그 분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거에요 . 한두 줄 뜨는 걸 배우면 금방 익혀요 . 그 다음부터는 도면보고 응용해서 뜨고 하는 거죠 .
그 당시는 사이즈가 정확하게 나와야 해요 . 사이즈가 안 나오면 다시 반품이에요 . 지금은 스웨터를 공장에서 기계가 짜는데 그 당시는 다 사람 손으로 짰어요 .” 어머니 말을 잘 들었던 진숙 씨는 경천에서 농사짓는 남자와 선을 보고 20 살에 시집을 갔다 .
도라지 , 생강 , 대추 농사를 크게 짓던 시댁이었다 . 겨울에 시집와서 담벼락 너머로 동네를 내다보았던 새색시는 다음 해 가을이 되어서야 밭에 나가 콩 타작을 시작으로 바깥일을 시작했다 .
부업거리 어디 없나 찾던 와중에 고산읍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진숙씨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일거리를 찾아냈다 . “ 결혼하고 나니까 다시 뜨개질하고 싶더라고요 . 제가 원래 밤잠이 없어서 심심하던 찰나에 다시 뜨게 되었지 .
고산읍내 터미널 뒤에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자동자 구술방석을 취급했어요 . 자동차 시트 있잖아요 . 그걸 휜 실로 코바늘로 짰어요 . 그것도 꽉꽉 조여야 빳빳해 , 그래서 장갑 끼고 꽉꽉 조이면서 짜는 거죠 .
하여간 흐물흐물하면 안 되니까 .” 낮에 모심을 때 틈틈이 뜨개질 부업거리 이야기를 했고 관심을 보인 동네 아낙 네댓명이 밤에 찾아와 뜨개질을 배웠다 . 그렇게 원용복마을 뜨개질 부대가 탄생했다 .
모여 놀 시간조차 없던 생활력 강한 여자들은 해가 떠있는 내내 논과 밭에서 일하면서도 ‘ 방석 얼만큼 짰냐 ? 뭐가 잘 안 된다 , 밤에 우리 집으로 와라 알려 줄테니 , 다 짰냐 ?’ 수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오늘 저녁 ‘ 구술방석집 가자 ’ 가 일종의 신호였다 .
원용복마을 뜨개질 부대는 식구들 저녁을 차려놓고 저녁 6 시 버스를 타고 고산으로 향했다 . “ 동네 여자들이 일주일 동안 만든 걸 다 싸서 이고 지고 버스 타러 나가는 거지 . 고산 성당앞에서 내려요 . 그걸 빨리 갔다주고 와야 막차를 탈 수 있으니까 .
방석집 가서 뜨개질 한 거를 내놓으면 거기 사장이 검사를 하는 거지 . 사이즈는 맞는지 , 짱짱한지 . 괜찮다고 합격하면 다시 재료를 받아요 . 푸대에 실이랑 구슬이 20 개씩 봉다리 속에 들어가 있어요 . 그럼 그걸 이고 지고 다시 성당 앞으로 가서 막차를 타는 거야 .
뭐시라도 먹고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 헐레벌떡 집에 와서 빨래 빨아 널고 밥 한 숟갈 먹고 방에 들어가서 뜨개질하기 시작하는 거지 . 어떨 때는 손가락이 달아요 . 움푹 들어가 있어 .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 손노동의 연대기 사남매 낳고 키우면서도 계절에 따라 쉬지 않고 늘 일거리를 찾았다 .
농사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동네 사람들은 마을 근처 냇가로 향했다 . 냇가 옆에 둑을 쌓는 일인데 일명 ‘ 돌일 ’ 이라고 불렀다 . 여자들은 냇가에서 돌을 나르고 남자들은 철망 속에 돌을 넣고 일정하게 쌓는 일이었다 . 그리고 봄이 오기 전에는 ‘ 삼장일 ’ 을 했다 .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인삼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현재는 검은 차광막을 사서 씌우지만 80 년대 무렵에는 볏짚으로 일일이 꼬아서 나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
마을 사람 네댓명이 돈을 모아 볏짚 꼬는 기계 ( 제승기 ) 를 사서 공동작업을 했는데 나이 든 여자들은 기계 앞에 앉아 볏짚을 겹치지 않게 넣어주는 일을 했고 가장 젊었던 진숙씨는 하루종일 엎드려서 엮어져 나오는 6 미터 길이의 삼장을 돌돌 말아서 쌓는 일을 했다 .
고된 일이었지만 신명나게 일하던 시절이었다 . 1975 년에 경천으로 시집와서 도라지 , 생강 , 대추 , 인삼 , 포도 , 논농사 짓고 살던 진숙씨는 89 년 다시 전주로 나오게 된다 . “ 시골서 계속 농사짓고 살다가는 애들 못 가르치겠더라고 .
상의해서 애들 아빠는 고향 남아서 농사짓고 내가 애들 데리고 전주로 간 거지 . 주말에는 계속 경천 와서 농사 일 거들고 . 모래내 시장에 ‘ 러브혼수방 ’ 이라고 가게를 10 년 운영했지 . 누비이불을 주로 했어요 . 그러다가 방문판매화장품 ‘ 헤라 ’ 들어가서 딱 16 년 일했어요 .
마사지 자격증도 따서 일했어요 . 주로 가정주부들이 고객이었고 그 당시에 헤라가 고급 화장품이었지 . 내가 운전해서 진안까지도 다니고 그랬지 . 21 년 까지 하다가 이제 안 해요 . 이제 일 끝냈어 .” 미련 없이 개운하게 ‘ 일을 끝냈다 ’ 다고 말하는 진숙 씨 .
그리고 이제는 어디든지 놀러 다니려는 마음만 먹었다는 말에는 왠지 모를 단호함이 느껴진다 . 한때는 논다는 것이 흉이 되던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놀아야 한다 . 33 년차 베스트 드라이버 오진숙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마음껏 놀러다니기를 전적으로 응원한다 .
/ 글·사진=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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