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맥없이 좋은 것은 언젠가는 꼭 해야 해
- 화산면 신공마을 심계택 이야기
덩치가 유난히 작았던 산골 소년은 도무지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극성스러운 장난꾸러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부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눈에 생기를 돌게 하는 존재는 꽹과리를 든 마을 어르신이었다.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막걸리 마시며 농을 하던 어른들은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각자 장구며 징이며 북이며 꽹과리를 들고 당산나무 아래로 모이는 것이다. 마치 신분을 숨기고 일상을 살아가는 영웅들처럼. 산골 소년의 눈에는 그들이 슈퍼맨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 마을은 마을굿을 한 달간 했어요. 겨울에는 할 일이 없잖아요. 지신밟기 한다고 집마다 돌아다니며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우물굿, 부엌굿 하면서 풍장을 치는 거지. 그 어른들 뒤로 동네 애들이 우르르 따라다녔어요.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나는 그때 꽹과리 치는 어르신을 유심히 봤어요. 그게 맥없이 좋았어요.”
이 이야기는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 청년에서 중년이 되는 동안 더욱 견고해져 결국 발현되는 이야기다. 먹고 사는 일을 어느 정도 다져놓은 뒤 98년 풍물을 배우기 위해 전북도립국악원을 찾아간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고 현재는 완주에서 알아주는 상쇠꾼이되었다. 화산농악단의 상쇠로 시작해 현재는 고산 삼우초등학교 풍물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는 심계택씨(1959년)를 만났다.
쌀 두말을 살림 밑천 삼아 서울로 향한 16살 소년
화산면 신공마을에서 나고 자란 심계택씨는 74년에 화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 시절 또래 친구들은 학업보다는 생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 당시 우리 마을 동창들은 거의 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기술배웠어요. 그때 어머니가 준 쌀 두말을 등에 메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전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타고 서울 동대문터미널에 내렸죠. 눈이 휘둥그레졌지. 무겁기는 하고 촌놈이 얼마나 놀랐겄어요. 친척이 운영하는 요꼬(편물)공장에서 일 배우다가 양복재단 기술을 배웠지. 74년~92년까지 명동에서 양복재단사로 일했어요. 직장이 명동이었으니까 참 재미있었지. 내가 다니던 공장이 어디였냐면 명동성당 밑에 마샬미용실이라고 거기가 우리나라 미스코리아 배출한 곳이지. 그 옆에 있었어. 나도 한창 젊을 때니까 장발머리하고 나팔바지 입고 송창식 통기타 공연도 보러 다니고, 들고양이 공연도 보고 그랬죠. 마포에서 문칸방하나 얻어서 자취하면서 직장을 다닌 거지. 그때 기술을 선택한 것은 한 번도 후회 안 했어요. 그때 배운 기술로 평생 먹고살잖아요. 세탁소하면서 옷 수선일도 하고.”
맞춤복이 하향길에 접어들면서 심윤택씨는 직업을 전환하게 되었다. 1992년에 전주로 내려와서 세탁소를 시작했다. 6년 동안 열심히 일해 자리를 잡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을 배우기 위해 전북도립국악원으로 향했다.
풍물 배우듯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을걸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뒤늦게 만난 심계택씨는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새벽 5시에 출근해 옷수선과 세탁일을 마치고 낮시간에는 꽹과리를 잡았다.
“98년에 시작해서 기초반, 연구반, 전문반 이렇게 3년 반을 배웠어요. 그렇게 하고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개인레슨을 받는 거죠. 장구는 이리농악 김형순 선생님께 배우고 꽹과리는 부안농악의 故나금추 선생님에게 배웠죠. 배우면서 어쩌다 풍물을 지도하게 되었냐면 99년 말에 내 고향 화산면에서 연락이 왔어요. 화산농악단에 상쇠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고향 마을 분들이 내가 풍물하는 걸 아셨거든.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났지만 마을일은 놓지 않았어요. 신공마을에 청년회를 조직해서 어르신들 마을회관에 모셔놓고 공연을 한 거죠. 도립국안원 인맥으로 가야금병창, 민요, 무용, 농악 등 공연자들을 섭외해서 무료봉사를 한 거죠. 그렇게 화산농악단 상쇠를 하면서 지도해서 몇 달 뒤에 완주군수배 대회를 처음 나가서 장려상을 받았어요. 그 뒤 2001년에는 대상을 받았지. 이상하게 상복이 있어서 대회만 나가면 상을 받았어요. 농악부분으로 전라북도 지도자상을 받았죠. 저는 뭘 하면 대충하는 법이 없어요. 욕먹을 때까지 가르쳐요. 학생들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죠. 제가 습득이 느린 면이 있어서 더 끈질기게 가르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들어온 배움은 절대 잊히지 않죠.”
심계택씨는 호남우도농악의 계보를 잇고 있다. 좌도에 비해 부드럽고 느리지만 섬세하게 연주해야 하는 우도농악에서 상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락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변형되어 다채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지휘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부포놀이는 호남우도농악에서 단연 돋보인다. 새의 깃털로 꽃 모양을 만들어 상쇠의 전립(모자)에 매단 것을 ‘부포’라고 부르는데 미묘한 고갯짓과 움직임에 따라 부포가 흔들리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것을 ‘부포놀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무릎을 굽히면서 땅을 누르는 ‘오금질’이다. 자근자근 땅을 밟으며 부드럽게 이어지는 미묘한 이 몸동작을 익혀야만 농악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움직임은 오금이 기본이에요. 국악, 무용, 택견도 다 오금질이 들어가죠. 초등학생들 가르치면서 다른 건 다 따라오는데 이 오금질 가르치는 것이 제일 어려워요. 4학년까지는 앉아서 풍물을 가르치는데 5학년부터는 서서 치는 선반을 가르쳐요. 그때부터 오금질을 배우는데 요즘 애들은 다 K팝을 들으니까 이 몸짓을 익히는 것이 쉽지가 않죠. 오금질을 해야만 부포놀이를 할 수 있어요.
저는 무서운 선생님이에요. 절대 떠들지 못하게 해요. 예의가 있어야 하거든요. 하나의 단체를 운영하려면 화합해야 해요. 누군가가 특출나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같은 호흡으로 화합하며 움직일 수 있도록 기본을 지키는 수업을 하죠. 기초가 중요하고 노력과 끈기가 있어야 해요.”
몇 해 전 단오제 때 천방지축 뛰어놀던 아이들이 자근자근 오금질을 하며 짐짓 진지한 눈빛이 되어 서로 호흡을 맞추며 풍물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의 가슴 속에 어떤 씨앗이 심어졌을까. 그들의 호랑이 풍물선생님은 풋풋하던 시절 맥없이 좋아하던 것을 잊지 않고 품고 있다가 기어코 피워내고 말았다.
/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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