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면 라복마을 박일진 이야기 (下)

달님(정현순)의 진두지휘아래 아침을 차리고 있는  소자(박일진) (1).jpg
박일진 씨가 소밥을 주고 있는 모습.jpg
박일진 정현순부부가 살고 있는 화산면 라복마을의 농가주택. 마을안의 작은 저수지풍경이 마을에 들어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jpg
완주한우협동조합 제공.jpg


그저 산 사람이 되고 싶었던 소자(小子)

- 화산면 라복마을 박일진 이야기



1994년 박일진 씨는 무소유와 영성 수련을 실천하는 공동체 전원살림마을의 수련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현재의 삶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무소유 공동체 생활을 2년 동안 했죠. 수련생들 뒤치다꺼리하고, 애들 수련생들 오면 같이 놀아주고 그랬죠. 여태권 목사님, 한상렬 목사님도 그때 만났죠. 저는 세상을 떠나 할머니처럼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했어요. 수행에 초점을 두고 철저히 내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싶었고 보고 싶었죠. 할머니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있었는데 그 분의 자연과 우주에 대한 공경 하는 마음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2년 동안 피폐했던 몸과 마음을 위로받았던 시절이었죠. 달님(정현순)은 어찌 알게 되었냐면 제가 91년 수배생활 할 때 우리 달님이 광주 발산교회 목사님이었는데 그곳에 저를 숨겨주셨죠. 그 후 제가 감옥 갔을 때 달님이 제 옥바라지를 해줬죠. 출소해서 힘들어 할 때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준 분이 달님이었죠. 전원살림마음에서는 이름으로 안 부르고 자신 스스로 별명을 지어서 그 별명으로 서로를 불러요. 내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어서, 작은 것에 집중하고 담담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소자라고 지었죠. 우리 집사람은 별칭을 달님이라고 지었어요. 우리는 그때 만나서 그렇게 서로를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달님, 소자가 익숙하죠. 수련공동체 들어가서 생활하던 중 불꽃이 튄 거지. 그래서 달님이랑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일단 가족이 생기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결혼하게 되면서 공동체에서 나오게 됐어요.”

 

비봉면 봉산마을에 터를 잡다

91년에 말에 민주화운동으로 수배 중이었던 소자와 그를 숨겨주었던 빈민교회 목사 달님은 94년에 다시 만났고 97년 전주 고백교회에서 한상렬 목사의 주례로 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완주 비봉면 봉산마을로 이끈 이는 여태권 목사였다. 급히 살 집을 찾느라 다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그 집이 퍽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집 뒷산의 대나무를 베어다가 엮어서 담장을 수리하고 무너져가는 집을 다듬어 갔다. 진달래 따다가 술을 담고 효소를 담아 이웃들에게 나누며 담담하고 소박한 신혼생활을 누렸다. 치열한 투쟁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돌보며 구도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저는 사회활동은 안하겠다, 마음먹고 시골로 들어왔는데 어르신들이 새벽 5시쯤 방문을 두드려, 우린 자고 있는데. ‘어이 뭐해? 일어났어? 우리 저기서 뭣 좀 할라는데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젊고 힘이 남아도니까 부르면 거침없이 무조건 갔죠. 그것이 소문이 났는가, 뭔 일만 있으면 저를 부르는 거에요. 동네 머슴이었죠. 사람들이 부탁하면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사회를 멀리할 수 없었죠. 그렇게 살다가 일종의 생계, 경제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 거죠. 축의금으로 딱 천만원이 있었는데 1년 생활하고 나니 우리 수중에 남은 돈이 딱 이백만 원이에요. 마냥 논 것도 아니거든요. 나락농사, 수박농사 나름 농사도 많이 지었는데 내년에 뭘 먹고 하지 걱정이 되는 거에요. 고민을 했죠. 근데 우리 집사람이 인덕이 참 좋으신 분이에요. 광주 빈민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던 당시 전남대, 조선대를 중심으로 의대, 간호대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했어요. 그 청년들이 다 커서 의사, 간호사가 된 거죠. 그 사람들이 새날의원을 만들고 지역공동체 의료 활동을 하면서 한푼 두푼 모아둔 돈을 우리 집사람 정착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후원해준 거죠. 그래서 그 후원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을 이웃들에게 상의를 했죠. 그때 여목사님의 권유로 율곡리에서 소를 키우게 된 거죠.”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동조합의 탄생

그 당시 여태권 목사의 권유로 무공해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힘들게 지은 쌀을 헐값에 넘기기 억울해 직접 방아를 찧어 지인들에게 제값에 판 것이 시작이었다. 이 직거래가 소문이 나며 주변 농가들이 동참을 요청해왔고, 그것이 땅기운작목반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판로가 없어 필자가 직접 1톤 트럭을 몰고 광주, 전주 등을 다니며 무보수로 배달하는 고생을 자처했다. 이후 '한울생협', '한살림', '초록마을' 등과 연결되며 친환경 농산물 유통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IMF로 소 값이 폭락하며 축산 농가들이 절망에 빠졌던 1998년 무렵, 멈춰 섰던 완주한우영농조합을 다시 살리기 위해 동참했다. 선배들의 권유로 얼떨결에 총무를 맡아 남은 13명의 농가와 함께 재정비에 나서며 유통과 판로를 고민하며, 농민들이 직접 '칼잡이'가 되어 현장을 지켜낸 투박한 진심이 공동체 회복의 밑천이 되었다. 손을 베어가며 익힌 기술은 단순한 육가공법이 아니라, 생산부터 유통까지 농민이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는 절실한 깨달음이었다.

오랜 시간 지역에 뿌리를 두고 신뢰를 쌓아온 조합원들의 땀방울은, 2012년 전라북도 제1호 협동조합인 완주한우협동조합을 세우는 가장 단단한 밑천이 되었다. 60명으로 시작한 조합원은 현재 325명까지 늘어났으며, 박일진 씨는 총무이사를 거쳐 2025년 대표이사로서 조합의 설계를 도맡고 있다.

사실 그는 경제관념이 무척 부족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세상살이보다는 산사(山寺)의 스님 같은 성정에 더 가까웠다. 처음 소를 키우게 됐을 때도 빚은 여전했지만 축사를 갖추고 아르바이트로 사료 값을 대고 있으니, 마음만큼은 이미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완주라는 마을이 아니었다면 진즉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고마움에, 이제는 지역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앞섰던 젊은이였다. 최근 달님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지역 일에 뛰어들며 보람을 찾던 그 시각, 달님은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고 있었다. 남편은 이 정도면 되었다며 밖으로 돌았지만, 달님은 여전히 남은 빚과 완전한 자립을 걱정하며 현실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박일진 씨가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대외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게를 묵묵히 견뎌준 아내 '달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빛의 전문가이지만, 아내 곁에 서면 그는 다시 소박하고 순수한 '소자'가 된다.

 

이른 아침, 소들의 끼니를 모두 챙기고 나서야 축사 한편에서 달님이 준비한 따뜻한 생강차를 나눠 마신다. 소들이 콧김을 내뱉으며 여물을 씹는 소리가 아득하면서도 편안하게 들려온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충만함이 차오른다.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데 달님이 수줍게 아침 식사를 권한다. 이토록 이른 아침에 타인의 집에서 아침을 함께하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낯선 경험이다. 식탁 위에는 손수 만든 요구르트와 사과, 정갈한 밑반찬과 뭉근하게 끓여낸 누룽지가 올랐다.

소밥을 줄 때의 손길이 고요한 명상 같았다면, 사람 밥을 차려내는 부부의 움직임 또한 그 결이 다르지 않은 명상 같다. 소밥과 사람 밥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 어느새 그들의 삶은 소와 사람, 일과 일상이 경계 없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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