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면 라복마을 박일진 이야기 (上)

화산면 화월리에 있는 소막에서 키우는 소들 앞에 선 일진 씨.jpg
이른 아침 어둠속에서 명상하듯 일하고 있는 박일진 정현순 부부.jpg
조선대 1988년 1.8항쟁 당시 대학본관 건물에서 농성중인 학생들 (조선대 자료사진).jpg
월출산 전경(사진출처 위키피디아).jpg


그저 산 사람이 되고 싶었던 소자(小子)

- 화산면 라복마을 박일진 이야기



1월의 새벽 6. 집을 나선다. 까마득한 어둠을 뚫고 화산면 라복마을로 향한다. 간간이 눈발이 흩날리다가 산언저리 하늘 끝이 까만색에서 쪽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일 테다.

화산면 화월리에 박일진, 정현순 부부가 일하는 소막이 있다. 60마리 정도가 살 수 있는 규모지만 소들 편하게 지내라고 30마리만 키우고 있다. 사람 밥 먹기 전 소밥 먼저 챙긴다. 순한 소들은 낯선 이가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김을 내뿜으며 식사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일한 부부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은 그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가깝다.

완주에서 박일진이라는 이름은 유명한 이름이다. 현재 완주한우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며 완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농축산업 전문가이다. 부인 정현순씨 또한 1990년대 광주 발산교회를 중심으로 빈민탁아를 실천하며 우리동네아기둥지를 운영해, 광주·전남 지역 탁아소 연대인 광주지역탁아소연합 결성의 한 축을 담당한 인물이다. 한 시절을 뜨겁게 살아낸 정현순씨는 이제 단순하고 조용한 삶을 즐기고 있는 터라 슬그머니 뒤로 빠지며 박일진씨를 앞세운다. 이들 부부는 처음 만났을 때의 별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달님소자’.

소자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뜻하며, 더 낮아지기 위해 박일진(1968년생)씨 스스로 붙인 별칭이다. 이 글은 그가 어떤 연유로 이러한 별칭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이 왜 직함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 버텨온 시간으로 설명되어야 하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월출산 타잔 시절

전남 영암 월출산 중턱 암자에서 태어났어요. 할머니가 스님은 아니셨지만 중간 경계에 있는 분이셨죠. 득도를 하셔서 할머니를 따르는 신자들이 많았어요. 소문에 의하면 할머니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학이 내려와서 할머니를 날개로 덮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일종의 설화라고 해야겠죠. 그런 소문이 마을로 퍼져나갔고 상담할 일 있으면 자문도 구하고, 아픈 사람 치료도 하고 복도 빌어주시면서 그 자리에 동네 분들이 암자를 지어주셨죠. 그곳에서 대식구가 살았어요. 할머니 시봉하는 보살님들, 큰아버지 식구 여섯, 우리 식구 여섯, 거의 스무명 가까이 모여 사는 공동체였죠. 저는 그 암자에서 태어나서 10살까지 살았어요. 무슨 암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불당에서 놀았던 기억들은 나요. 숨박꼭질 한다고 부처님 불상 뒤에 숨어있던 기억. 아무나 못 들어오던 곳이었지만 저에게는 그곳이 놀이터였으니까요. 저는 어린 시절을 타잔처럼 살았어요. 산을 엄청 빠르게 탔어요. 일상이 산을 타는 것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엄마 따라 산타고 나무해오고 그런 것에 너무 익숙했죠. 월출산이 바위산이라 바위 위를 폴짝폴짝 뛰어서 올라가고 폴짝 뛰어서 내려오는 것이 몸에 배서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산과 관련해서는 두려움이 거의 없었죠.”

박일진씨의 할머니는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치 마고할매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찾아와 시주를 하면 할머니는 그 돈을 어려운 이들에게 되돌려 주곤 했다. 9살 어린아이는 많이 가진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늘 어려운 이를 돕고 개미 한 마리도 밟지 않으려 땅을 보며 천천히 걷는 할머니에게서 배운 자세다. 그는 태어나서 10살 때까지 자란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관, 성향이 갖춰진 것 같다고 말한다.


뜨거웠던 광주에서 보낸 20대 시절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님과 네 형제는 산 아랫마을로 독립하게 된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암자를 떠났지만, 그때부터 빈곤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네 형제 중 장남이었던 박일진 씨는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곧잘 했으나, 대학까지 진학하는 것이 부담으로 느껴져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다. 3 겨울방학 무렵, 돈을 벌기 위해 난생처음 서울로 향했지만 대도시의 삶은 혹독했다. 결국 한 걸음 물러서 1년간 재수한 끝에 조선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하필이면 입학하던 그때가 1987년이었죠. 처음에는 공부만 열심히 해서 전액 장학금 받으면서 1학년을 다녔어요. 1학년 2학기 때부터 학생운동에 걸려든 거지. 그 당시 총장이 독재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 불만이 쌓여 있었고, 체육대 학생들을 동원해서 폭력으로 진압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어떤 계기로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거죠. 제가 그 당시 1학년 과대표였는데 선배들이 애들 다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를 하더라고요. 뭔지도 모르고 나갔는데 엄청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더라고. 가슴이 뜨거워지죠. 거기에 내가 맛 들린 거에요. 각 학과 학년 대표자들이 모여서 농성을 해야 한다는데... 어차피 자취방가서 밥해먹기도 귀찮은데 같이 어울려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학교에서 농성을 한 거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친구들이랑 선배들이랑 함께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해 겨울쯤 되니까 다른 학과 선배가 와서 학내 민주화투쟁만 가지고는 안된다, 군사정권에 저항해야 한다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또 마음이 뜨거워 지더라고. 어찌하다 선배의 꼬임에 빠져서 이 길에 들어선 거죠. 198818일 새벽 학교 농성장에 자고 있는데 경찰들이 진입해서 우리를 잡으러 왔죠. 끌려가서 구류 7일 살고 나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찰에 끌려갔던 거죠. 그러고 나왔더니 영웅이 되있더라고요. 이게 조폭세상이랑 비슷해요. 별 달고 나오면 대접받듯이.”

 

스무 살 청년들의 뜨거운 마음은 쉽게 식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을 스쳐 날아다니는 직격탄과 백골단의 살기가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신조가 비겁해지지 말자인데 가급적이면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전경들이 뒤에서 쫓아오면 사람들을 앞으로 보내고 가장 후발대에서 뛰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제가 엄청나게 싸움 잘하고 겁도 없는 줄 아는데 저는 정말 겁이 많아요. 다만 내 장기가 남들보다 달리기가 빨라요. 제가 월출산 타잔이잖아요. 그래서 전경들이 바로 뒤에서 쫓아와도 안 잡힐 자신이 있었지. 이제는 좀 잡히고 싶은데 나를 못 잡더라고.”

이후 투쟁위원장을 맡고 있던 중 전국수배령이 내려졌다. 전국에서 열세 명이 수배 대상이 되었고, 그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1년간 숨어 지내다 19919, 결국 자진출두했다. 검사는 징역 7년을 구형했고, 법원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 시절 사면을 받아 복역 24개월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감옥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과 현실 세상은 괴리가 컸다. 6개월 동안 방황하다가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월출산 중턱으로 향했다. 이 길을 다시 내려오지 않으리라 죽을 결심을 하고 어두운 밤에 산길을 올랐다. 바위 앞에 섰지만 두려움 뿐이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마음의 병을 마주하고 치유하기 위해 충남 금산에 있는 전원살림마을을 찾게 된다. 그곳은 무소유와 영성 수련을 실천하는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 달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 2월 호에 계속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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