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비비정마을 정도순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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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순 씨가 살아온 역사.jpg
정도순씨 친청어머니가 남기신 은가락지 .jpg


억순이 또순이 도순이

삼례 비비정마을 정도순 할머니 이야기

 


삼례 끄트머리 언덕빼기 위 노을이 고운 마을. 15년 전쯤 캠코더 한대 들고 그 마을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을 했었다. 무거운 카메라가방을 둘러매고 마을에 들어섰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허름한 마을회관 문을 열었는데 좁은 방에 할머니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계셨다. 목소리가 크고 호방한 모습에 기가 좀 죽긴 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퍽 다정하신 분들이라는 걸. 서로가 고생하며 살아온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과 다정함을 기록하며 잠시 동안 그들과 함께 했다.

 

완주에서 이미 유명한 삼례 비비정마을 이야기다. 2009~2012년까지 신문화공간조성사업으로 비비정마을 주민들은 많은 일을 해냈다. 좁은 마을회관에 모여 주경야독 공부를 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마을 카페와 농가레스토랑이다. 여러 매체에 소개되며 마을 주민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시절 부녀회장으로 마을 일에 늘 앞장섰던 이가 정도순씨(1950). 고생도 이력이 붙었는지 마을 레스토랑 운영하던 일은 그저 재미난 일이었다. 서로의 고생내력을 모두 알고 있는 마을 여자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십년 만에 도순씨를 다시 만나 마을일이 아닌 도순씨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마을로 시집와서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봤어. 비 오는 날도 혼자 일하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이 그러더라고. 너는 억순이 또순이다. 그게 내 별명이 되었어. 억순이 또순이 도순이!”

 


친정엄마 보란 듯이 살려고 힘들 세월 참아냈지

10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건만 반가움에 눈물이 슬쩍 맺혔다. 그 사이 허리는 약간 굽었지만 당찬 대장 같은 면모는 여전하셨다. 도순씨는 어떤 세월을 보냈길래 억순이 또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을까.

 

내 고향은 삼례 하리 용전마을이야. 비비정으로 시집왔지. 한마디로 자유결혼했어요. 우리 친정마을 사람들은 모래자갈 채취를 했어요. 그 당시는 일 할거리가 없으니까 동네 처녀들도 모래 채취하는 일을 했어요. 다른 마을서도 우리 마을로 일하러 왔는데 그때 우리 아저씨가 거기 있었던 거지. 모래채취하다가 눈이 맞은 거지. 그런데 우리 친정에서 엄청 반대를 했어요. 시댁 될 집이 곤란하게 살았거든. 우리 친정은 농사짓고 살만했지. 엄마한테 갖은 수모를 다 겪었어요. 뜨거운 숭늉을 나한테 쫙 찌끄려버리기도 했어. 없는 집에 안 보내려고 물불을 안 가리셨던 거 같아. 그래도 나를 결혼시키고 일주일을 제방타고 비비정까지 몰래 와서 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싸우는 소리 들리면 자기 딸 데리고 가려고. 싸움소리는커녕 웃음소리만 나서 엄마가 그냥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무리 고생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엄마한테 가서 말을 못했어요. ‘거봐라. 내 말 안들어서 고생하잖냐.’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엄마한테는 시집식구 말을 일절 안했어요. 엄마가 걱정할까봐.”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딸이 걱정돼 몰래 딸집을 오고 갔던 그 어머니가 걸었던 제방길. 몇 해 뒤 도순씨는 돌 지난 아들을 업고 친정엄마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고향마을로 향했다. 쌀 한되를 얻기 위해 꾸역꾸역 찾아갔지만 밥 달라는 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아 빈손으로 다시 그 길을 걸어올 때, 그때 흘리던 눈물은 왜 지금도 아프고 생생할까.

 

젊었을 때 다른 생각 할 틈이 없었어요. 오로지 돈을 모아서 우리 애들 가르쳐야지. 친정에 보란 듯이 걱정 끼치지 않고 살아야지 그런 생각만 했어요. 내가 눈치가 빨라서 시집오자마자 생활을 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시집오자마자 한 일은 홀치기야. 내가 처녀 때부터 전주 나가서 홀치기(물들일 천을 물감에 담그기 전에 어떤 부분을 홀치거나 묶어서 그 부분은 물감이 배어들지 못하게 하여 물들이는 방법)를 배워서 집에서 그 일을 했어. 흰 광목천에 땡땡무늬 박흰 거를 하나하나 틀에 걸고 실패를 굴려서 홀치는 거야. 그걸 일본말로 오비라고 그러데. 내가 비비정 마을 여자들에게 전수해서 부업으로 홀치기를 했지. 그렇게 번 돈에서 오백원씩 따로 모아 저축을 했어. 언제든지 싸움하면 집을 나갈 생각으로. 그러다 보니 그때 돈으로 95만원이 생겼더라고요. 그런데 애가 또 들어서네. 우리는 그냥 천생연분인가 보다 하고 애들 아빠한테 그 돈을 내놓았어요. 소라도 키워서 애들 학비라도 벌라고. 아니나 다를까 일 년에 한 번씩 송아지를 낳은 거야. 남편은 그것 키우면서 아이들 학비를 번거지. 그때는 하여튼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되더라고.”

 

오남매 낳고 정순씨의 남편은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에서 노동자로 10년 세월을 보내고 돌아왔다. 막내아들은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아빠, 아빠를 외쳤다. 남편이 해외에서 보내온 돈은 십원하나 쓰지 않고 모두 저축을 했다. 여자 혼자 오남매 키우며 살고 있는데 남자 놉 얻으면 괜히 동네에서 말 나올까봐 이를 악 물고 논일, 밭일을 혼자 해냈다.

우리 엄마가 나 처녀 때 이 집으로 시집 안 보내려고 점을 봤는데 점쟁이 말이 맞는 거 같아. 30살 넘으면 내 밥, 남 주면서 먹고 산다 그러더라고. 남편이 순해서 오히려 나랑 맞았던 거 같아요. 생활은 내가 잡고 굴리면 되니까 아무튼 그럭저럭 일이 잘 풀렸어. 생각한 대로. 논도 사고 땅도 사서 집도 짓고 전북대 앞에서 식당도 크게 하고 원룸사업도 하고 손해는 안 봤으니까 성공한 거지.”

 

그렇게 비비정농가레스토랑도 순풍에 돛 단 듯 풀렸고 2020년 도순씨는 일을 정리하게 시작했다. 밤낮없이 일만 한 도순씨에게 쉼이 찾아오나 했지만 큰 해일이 찾아왔다.

“2020년에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3기 암선고를 받은 거지. 수술하고 항암치료할 때 너무 힘들었어. 이런 모습 안 보이고 싶어서 멀리 춘천 사는 딸 집 근처 요양병원에 있었지. 4년 사이에 몸에 칼을 많이 댔어요. 무릎수술하고 허리 대수술하고. 아프기 전에 일이 잘 풀렸는데 이제 살만하니까 내가 아프게 되었지. 그래도 내가 아프면 마음은 편해. 자식이 아프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프지만 마음은 편했어. 그래도 어디 전이된 곳 없이 좋아요. 내년 3월 종합검진 받아보고 완치판정 받으면 끝이야.”

 

도순씨는 여전히 마을회관에 모여 밥을 나눠먹는 사이가 있어 안심이다. 함께 늙어가고 먼저 떠나간 이를 기억해 주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이웃과 나눠 먹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

예전에 비하면 안 짓는 편이지. 전에는 돌쇠처럼 모으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주는 게 더 마음 편하고 좋아요.”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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