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내 인생의 진정한 봄날!
- 삼례읍 전소순 할머니 이야기
옛사람들은 사람의 일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즐겨 비유했다. 여리고 풋풋한 어린 시절은 봄, 뜨거운 만큼 서둘러 지나가는 젊은 시절은 여름, 나보다 훌쩍 더 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중년은 가을, 조금은 쓸쓸해도 모든 것이 편안해지는 노년은 겨울에 빗대어졌다. 하지만 꽃 피는 봄은 어린 사람에게든, 늙은 사람에게든 어김없이 똑같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라도 꽃 피는 봄은 다시 찾아오는 법,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완주군의 ‘진달래 학교’라는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전소순 할머니에게도 이 산 저 산 진달래꽃이 만발한 봄이 다시 찾아왔다.
“그때 내 나이가 73살이었어. 남편이 79살에 돌아가시고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 하나랑 진달래 학교를 다닌 거야. 처음 갔더니 노인네들이 서른 명 정도 있어. 선생들이 다섯 명 정도 되고. 어떤 사람은 연필도 잡을 줄 모르고 모두가 아무것도 몰랐지.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고 어쩌다 보니까 글씨가 써지더라고. 글 쓰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선생님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잘하고 싶더라고. 그렇게 지금까지 재밌게 배우고 살아. 나는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워. 한 시간 반 공부하는데 그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까워. 지금은 A, B, C, D 영어도 배워.”
2017년, 완두콩에서 발행한 <완주할매들의 인생손글씨 할미그라피>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던 전소순 할머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다. 70년 된 부러진 감나무를 주제로 시를 쓰고, 손자들에게 편지도 쓰고, 꽃과 나무를 화려한 색채의 그림으로도 그렸다. 손자들과 자식, 사위들이 사다 준 스케치북과 색연필, 오래 써서 짧아지고 닳아진 연필과 지우개 같은 것들이 초등학생 공부방처럼 할머니의 집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할머니가 들려준 인생의 봄날은 그래도 큰 고생 없는 좋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내 고향은 임실군 청웅면이야. 딸 넷 중에 막내고 내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 언니 셋은 비단, 광목, 실 공장에 다니면서 살림 밑천을 벌어왔지. 그 돈을 우리 아버지는 허투루 쓰지 않고 다 모아서 논 사고 밭 사고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 나는 괴로운 것 없이 컸지. 친정이 먹고 살 만 하니 언니들도 시집을 가고 나랑 남동생은 어려운 시절 지나서 태어나서 별로 고생없이 자랐어. 아버지가 우리 순옥(어린 시절 이름)이는 비단 공단에 감아서 키운다고 그랬어. 임실 장날에 간다고 새벽에 일어나서 30리 길을 걸어 장에 갔다 오면 꼭 내 비단 옷감을 떠왔어. 빨강 치마, 노랑 저고리를 만들어서 좋게만 입혀서 내보내고 그랬지. 그런데 일정시대에다가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학교 공부를 못 배웠지.”
할머니는 열다섯에 서울로 올라가 남의 집 심부름도 하고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어 남동생 결혼도 시키고 아버지 농기계도 사드렸다. 공장 다닐 때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함부로 연애하면 다리몽댕이를 부러뜨린다는 아버지의 엄포에 제대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스물넷에 중매로 이곳 삼례로 시집을 왔다. 그렇게 가리고 가려서 시집을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오두막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살림살이였다고 한다. 남편은 순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경제적인 능력은 별로였다고 했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여름과 가을이 시작됐다.
“스물다섯 살 동짓달에 첫아기 딸내미를 낳았어. 그런데 배는 고프고 세상 참 힘들었어. 하도 배가 고파서 내 저고리 옷감을 신랑보고 쌀 팔아 오라고 했지. 근데 그 돈으로 노름을 해버리고 빈손으로 오는 거야. 배가 고파서 언제나 오나 연탄불에 밥솥을 올렸다 내렸다 새벽 내동 그러고 있는데 빈손으로 오는 거야. 그래도 미운지도 모르고 싸움할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산 거지. 그래도 주인집 큰방 아줌마가 씨래기국을 끓여서 밥이랑 한 대접을 가져다 줬어. 그걸 나눠 먹었지. 두 살 터울로 여섯 남매를 낳고 키우는 동안 삼례에서만 이사를 열두 번을 넘게 다녔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옛날 삼례시장 안에 집을 샀지. 그때 돈을 어떻게 마련했냐면 내 시계 팔고 반지 팔아서 마련했지.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내 집을 산 거야. 거기서 육남매 다 학교 보내고 키웠어. 고추장사, 쌀장사, 식당, 농사 일 안 해본 거 없이 다 하고 살았어.”
요즘 결혼식에서는 폐백음식이 많이 없어졌지만, 사실 전소순 할머니는 제법 솜씨 좋은 폐백음식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쉰 무렵부터 어렸을 때 번화하고 제사가 많았던 친정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폐백 일을 시작했고 일흔이 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그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젊은 엄마들 서너 명에게 폐백음식 전수하는 솜씨좋은 선생님이었다.
“내 나이 쉰 살 무렵부터 폐백을 한 거야. 처음에는 묵을 끓여서 피로연 음식으로 납품을 했어. 묵 끓이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메밀묵 두세 판씩 만들어서 납품한 거지. 그 뒤로 오징어 오려서 장식하는 폐백음식을 만들었어. 오징어를 그냥 오리면 안돼. 가운데 뼈다구를 갈라내고 다리 떼어내고 하얀 면보 깨끗한 것을 깔아. 그 위에 오징어를 착착 올려놓고 천을 덮어서 발로 잘강잘강 밟아. 한 시간을 밟으면 납작하고 반듯하게 펴져. 주름살 하나 없이 펴져. 그럼 그 판판해진 오징어 가운데를 잘라서 가위로 세심하게 가늘게 오려서 작업을 하는 거지. 자르면서 하나하나 손으로 말면서 작업을 하는 거야. 옛날에는 밤도 하나하나 까서 쌀뜨물, 설탕을 타서 저녁 내내 담궈 놓고 그랬지. 대추는 가운데 실을 꿰서 뱀이 똬리 틀 듯이 뺑뺑 돌려서 탑처럼 쌓아놓는 거야.
할머니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들이 드물게 화려하고 꼼꼼한 터치가 많아서 참 인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폐백음식 전문가셨다니 그 그림들의 색채와 스타일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그렇게 길고도 힘들었던 인생의 여름과 가을이 가고 일흔이 넘어 글을 배우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봄 같은 겨울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의 글씨 연습장에는 좋은 말들이 가득했다. 그 좋은 말들 중에 봄날의 새순처럼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고운 단어들만 골라 손끝으로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
“한글을 몰랐을 때는 창피하고 답답한 것이 많았는데 칠십이 넘어서야 진달래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글을 알게 되니 내 인생이 얼마나 당당하게 변했는지 알랑가 몰라.”
/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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