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읍 둔산리 왕안라 이야기

라인댄스팀 연습 중인 안라 씨.jpg
왕안라 씨의 취향이 담긴 거실.jpg
여행하며 모은 조각들.jpg
삼례읍 라인댄스팀 '프리티우먼'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가 안라 씨다..jpg


파란만장 유쾌한 왕언니

- 봉동읍 둔산리 왕안라 이야기



일흔을 넘긴 왕안라 씨(1953년생)에게 최근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 완주 삼례에서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했지만,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집에서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던 왕 씨는 친구의 권유로 완주시니어클럽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하게 됐고, ‘국수가락새참수레에서 일하게 됐다. 작년부터 맡은 일은 산업단지 근로자들의 이른 아침을 책임지는 일이다. ‘산단 근로자 천원의 아침밥사업을 사회적협동조합 양지뜰이 수행하게 되면서, 해당 기관에 소속돼 있던 왕안라 씨가 자연스럽게 이 일에 투입된 것이다. 지금도 그는 간단한 샐러드부터 샌드위치, 김밥까지 준비하기 위해 매일 새벽 어김없이 출근한다. 이곳에서 그를 부르는 호칭은 왕언니’. 음식 재료 손질부터 맛을 내기 위해서는 왕언니의 손길이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 완전 왕언니지. 다들 50~60대 정도이고, 자식 벌인 사람들이 많은데 거기서 내가 점잖떨고 있으면 사람들이 어려워하니까 내가 일부러 주책을 떨면서 기쁨조를 하는 거지. 젊은 사람들이랑 일하는 거 정말 좋아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엄마들에게 고맙다고 해요. 솔직히 나이 차이가 나면 좀 어렵잖아요. 그런데 나를 편하게 대해주니까 고맙지.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긍정적인 마인드로 경청하고 호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에요.”

 

노량진 설렁탕집 첫째 딸, 늘 사람이 그리웠던 시절

오전, 왕안라씨의 거실에는 빛이 한가득이다. 그의 큰딸이 지난밤 인터뷰한다는 엄마이야기를 듣고 양과자라도 대접하라며 용돈을 조금 보낸 모양이다. 집 앞 제과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사 온 따끈한 빵과 보이차가 다과상 위에 놓여있다. 집 벽면에는 왕안라씨가 직접 수놓은 수예작품들과 틈틈이 모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오며 만들고 모은 추억들이 자연스레 전시된 작은 전시장을 보는 듯하다. 그는 어디서 배운 적은 없지만 손재주가 좋아 무엇이든 잘 만드는 사람이다. 주체적으로 살아왔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향이어서 실패하더라도 또다시 도전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베푸는 걸 좋아하는 그의 성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 부모님은 이북사람이에요. 1.4후퇴로 고향 갈 길이 막히면서 노량진 본동에 자리잡고 빵집을 하다가 덕하옥이라는 설렁탕집을 운영했지. 부모님이랑 할머니가 같이 장사를 하셨는데 모두 다 생활력이 강했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갔다 오면 교복 벗고 가게 일을 도왔어요. 우리 친가가 전부 이북사람이다 보니 친인척들이 없어서 외롭게 컸어요. 12살 밑의 남동생 하나 있지. 나중에 결혼하면 자식을 한 12명을 낳고 싶었는데 딸, 아들 둘만 낳았지. 외롭게 커서 그랬나 사람이 늘 그립더라고. 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했지만 어찌나 무서운가 우리 엄마 시집살이 꽤나 시켰어요. 우리 엄마를 맨날 도둑년이라고 부르니까 어렸을 때는 엄마 이름이 도둑년인 줄 알고 학교 알림장에 엄마 이름을 그렇게 썼더니 어느 날을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왔던 일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할머니한테 화를 내더라고. 애가 뭘 보고 배우겠냐고. 그 뒤로는 할머니가 그 소리를 안 하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위했어요. 점심 장사 끝나면 엄마에게 늘 자유시간을 줬고 아버지가 주로 부엌에서 일을 했지. 내가 음식 잘하는 건 아버지 닮은 거 같아. 어머니는 집 안 정리하는 것과 뜨개질을 잘했고 할머니는 수를 기가 막히게 잘 놨거든. 어렸을 때 엉킨 실타래를 주면 내가 그걸 기어코 끝까지 풀었데요. 할머니가 그걸 보더니 저 기지배 편히 살긴 글렀다 그랬데요. 어디 가서 사주보면 손에 천복이 들었다는데 그게 큰 복인 줄 알았는데 이 손으로 고생하며 먹고 사는 팔자였던 거지.”

 

왕 씨의 아버지는 무엇이든 해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보면 너도 배워봐라하고, 기타도 배워보라며 직접 학원 등록까지 해주었다. 대신 스스로 서서 살아가기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라는 조언을 늘 아끼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해 중어중문학을 전공했고 중국문화원에서 1년 반의 직장생활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 군인과 편지를 주고받던 인연이 이어져 그 군인의 부대 소대장이었던 김판기 씨와 결국 부부가 된 사연은, 그 어떤 영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했다. 직업군인이었던 남편 따라 철원에서 땅끝마을 해남까지 10년 동안 서른 번 넘게 이사를 다녔다. 남편이 군부대를 나오면서 83년도에 전주에 자리를 잡았다. 왕안라씨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편은 건설회사를 다녔고 나는 학원을 차렸지. 영어는 선생님을 고용하고 중국어는 내가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시절에 중국어는 좀 빨랐던 거 같아. 그 뒤로 덕진우체국 옆에 수예점을 차렸어요. 홈패션도 하고 장사도 잘되고 그 시절에 주식도 시작했어요. 수익도 많이 보고 잃기도 하고. 나는 겁이 없었어요. 돈을 무서워하지 않았지. 무식하면 용감하더라는 말이 나한테 딱 맞는 거 같아요. 뭐든지 열심히 하긴 해요. 그 뒤로 남편이랑 부동산하면서 서신동 택지개발로 많이 벌 때도 있었지. 이런저런 투자가 실패하기도 하고. 하여튼 파란만장하게 살았어요. 롤러코스터같은 인생이었어. 20년 전에 삼례와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거지. 아들, 딸한테 각자도생해서 5년 뒤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식당하면서 정말 지독하게 살았어요.”

 

인생에서 가장 큰 파도가 닥쳤을 때 도망치듯 삼례로 왔고 이곳에서 회복의 시간을 충분히 거쳤다. 이제는 흔들림 없이 시련을 이겨낼 힘이 생겼다.

왕안라 씨는 새벽에 출근해 아침 무렵 일을 마친 뒤, 오후가 되면 삼례읍 행정복지센터로 향한다. 주민자치프로그램으로 3년 전부터 라인댄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프리티우먼라인댄스팀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치고 있다. 며칠 뒤에 있을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이다.

 

춤추는 동안 어떤 느낌이냐면. 아무 생각도 없어요. 오로지 스텝만 신경쓰는 거죠. 그게 좋은 거야. 잡념이 사라지는 것. 내년에는 기타도 배우고 싶고 전공 살려 중국어수업도 해보고 싶어요. 내 나이쯤 되면 혼자 노는 법을 익혀야 해요. 그리고 일순위가 나야. 나이가 이 정도 되었으면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만 주변 사람들이 편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회한은 남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계산하지 말고,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오늘 하루 잘 살았다면 그걸로 끝, 지나간 것은 그저 지나갔을 뿐이라는 말처럼. 작은 일에도 마음이 쓰여 속이 상할 때면,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온 왕언니의 이 명언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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