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황조리마을 김맹준 이야기 (上)


타고난 손재주로 투박하게 살아온 삶

 - 동상면 황조리마을 김맹준 이야기

 


김맹준 씨는 1955년 동상면 사봉리 황조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후 스무 해가 지나서야 전기가 들어왔으니 호롱불과 호야등 켜고 지내는 생활이 익숙했던 터라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노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육체노동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맹준 씨의 노동연대기는 그의 나이 10살부터 시작된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가 소년에게 버거웠지만 유난히 손재주가 좋았던 아이는 동네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고 어른 한 사람 몫을 제법 잘 해냈다. 그의 어머니 이부열 여사는 옆에 붙어 있으려는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떠나거라. 도시로 나가거라. 고향 떠나 살거라.’

아들이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랐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보냈다어머니 말을 잘 듣던 그는 마지못해 도시로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또 등 떠밀렸지만 기어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묘와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까지 마을 뒷산 양지 바른 곳에 모셔놓고 나니 어린 소년은 일흔을 훌쩍 넘긴 어른이 되었다. 전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아내 일을 도우며 자신은 고향 땅에 농사를 짓고 손기술이 아까워 부업 삼아 집수리 일도 종종 한다. 장사하며 사람들 상대하는 것 보다 투박한 손을 굴려 먹고사는 것이 천직인 사람이다.

 


맹준 씨의 노동연대기

혼자 된 몸으로 사남매 굶기지 않으려 먼동 트기 전에 밭으로, 산으로 나서야 했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맹준 씨는 투정 부릴 새가 없었다. 소년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내 또래 친구들도 내가 한 일을 이야기하면 이해를 못하더라고. 부모형제있는 애들은 그런 고생을 안 했으니까. 나는 11살부터 지게질하면서 살았어요. 산에 가서 땔감 주워 오고 나락을 주워다가 홀태에 훑어서 솥에 쪄서 햇빛에 말려서 도구질해서 동생들 밥을 해 먹였지. 학독에다가 보리쌀 갈고. 아랫집 할머니한테 맨날 혼나감서 배웠어. 동네 어른들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어요. 손재주는 내가 생각해봐도 타고 난 거 같아요. 지게바작이나 멍석 같은 것도 한번 보면 만들 수 있겠더라고. 14살 때는 지게를 만들어서 동네 어른들에게 팔기도 했어요. 맹준이가 야무지게 잘 만든다고. 그때 일당 받는 일을 해봤어요.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다녀야 한다고 해서 억지로 가긴 갔는데 아침에 어른들이 연석산으로 풀치러 가는데 나보고 ! 학교는 무슨 학교야. 임마! 산에 가서 풀이나 쳐라그래서 가방 놓고 어른들 따라 산에 가서 하루일당 60원 받아봤지."

"15살 겨울방학 때는 동네 할아버지가 초가집 지붕을 이는데 나보고 같이 하자고 그래요. 짚을 엮어서 이엉을 만들고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지붕도 새로 했지. 그 당시 어른들 하루 품삯이 200원이었는데 나는 250원을 주더라고. 일도 잘하고 술, 담배도 안 한다고. 그때 처음으로 많이 받아본 품삯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빚 때문에 죽어라 일을 해야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고산농협에서 빚이 있다고 찾아왔는데 그때 돈으로 삼만 원. 어머니는 갚았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확인할 수는 없고 억울하지만 갚았죠. 어머니랑 나랑 산에 가서 양귀비 농사를 지어서 나 16살엔가 그 돈을 다 갚았어요. 그 당시 이 동네사람들은 산에서 양귀비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불법이라고 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 되는 것은 다 했지. 그 뒤에는 경찰들이 단속하고 흉흉하니까 그만 뒀지. 16살 고향 떠나기 전에 이 동네에서 일이라는 것은 다 했어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화전을 일구다

16살 중학교 졸업하고 도시로 떠나라는 어머니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군산, 대구, 전주에 있는 공단을 떠돌며 가구 조각하는 일을 배웠다. 거뭇거뭇한 청년이 된 19살 맹준 씨는 힘도 넘치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푸른 마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때 내가 고향 와서 처음 한 일이 저그 황새목에 화전을 일궜어요. 땅이 없으니 산 골짜기에 불을 질러서 괭이로 땅을 파서 밭을 만들어서 담배농사를 지은 거죠. 그해 가을에 담뱃잎 팔아서 24만원을 벌었어요. 그 당시 쌀 한 가마니에 만 원 할 때였어요. 밭은 세 가마니 주면 200평을 살 수 있었고 논은 열 가마니를 주면 살 수 있었지. 그 이듬해에 또 농사지어서 27만원을 벌고 그 돈으로 논을 닷 마지기를 샀어요. 그 논에서 첫해 농사를 지었는데 아끼바리 쌀을 열 세가마니 수확을 했죠. 동네 길가 방앗간에서 쌀을 방아 찧어다가 집에 쌀가마니를 딱 쌓아놓고는 어머니를 불렀어요엄마! 나 내년부터는 보리농사 안 지어. 이제 보리밥 안 먹어. 우리 이제 쌀밥 실컷 먹자!!’ 보리가 얼마나 질리던지 사람들은 건강에 좋고 별미라고 먹는데 나는 50살이 넘도록 보리밥집은 절대 안갔어요. 쌀가마니를 쟁여 놓으니까 정말 부자가 된 거 같더라고요. 젊지. 일할 수 있지. 그러니까 신이 났지.”

 

이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말이 하도 생생해 스무 살 시절의 얼굴이 일흔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자신이 농사지은 쌀을 집 안에 쌓아놓고 어머니를 큰 소리로 불러 세워 그 쌀을 자랑하던 스무 살 청년의 눈가에는 지금처럼 촉촉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어 자신의 힘으로 고향에 땅 팔천평을 사고 마을에서 둘째 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 시절이 맹준씨의 화양연화 시절이었을 것이다.

 

동상면에 우리 또래, 54~55년생들이 60명 정도 되었어요. 동상면 청년회를 조직했죠. 그 당시는 원체 산골이다 보니 평생을 동네에서만 지내던 시절이었죠. 나는 20살에 동상면을 다 돌아다녔어요. 이 일대 사람들을 다 알지. 청년회 조직해서 동상면 마을 일을 했어요. 여기저기 기본적으로 50(20km)를 다 걸어다녔죠. 농사짓다가도 청년회 누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면 걸어서 가는 동안 하루가 걸려. 중간에 마을 들려서 사람들 불러서 같이 가고. 처음에 혼자 걷다가 나중에 눈덩이 불어나듯이 여러 명이 함께 걸어가서 초상집 갔다가 또 돌아올 때 하루 꼬박 걸리고. 그때 그 청년회 조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어요. 초중학교 동창들 모임을 지금껏 하고 있죠.”

 

맹준 씨가 어머니 말을 거역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고 한다. 14살 때 학교 가라는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산으로 돈 벌러 갔던 때였다. 24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한 여동생을 데리고 도시로 떠나라 했고 그는 순수하게 그 말을 따랐다


- 다음 호에 계속



/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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