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다스림의 음악] 누군가의 그늘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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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그늘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25) 헨델의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



하와이에서 햇볕보다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을 가려주는 나무들입니다. 대학 캠퍼스에 서 있는 바오밥나무, 와이키키 해변에서 걸어가는 나무라 불리는 반얀트리. 그들은 하늘을 향해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땅으로 뿌리를 늘어뜨리고 다시 그 뿌리로 몸을 세우며, 자기 자신을 확장해 또 하나의 그늘을 만듭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처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늘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오래 살아남은 생명만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선물입니다.

헨델의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Ombra mai fu”)를 세실리아 바르톨리의 목소리로 들을 때면 이 하와이의 나무들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다정한 그늘은 없었네.” 왕 세르세가 찬미한 것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쉼의 자리였습니다. 바르톨리의 노래는 그 쉼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을 고르듯 오래 살아온 몸의 기억을 따라 천천히 그늘 속으로 들어갑니다.

헨델의 이 아리아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노래는 세계 음악사에서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흔히 [라르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지만 본래의 제목은 이탈리아어 가사 첫 구절에서 온 것입니다. 번역하면 이토록 사랑스럽고 다정한 그늘은 없었네쯤 됩니다. 오페라에서 이 노래의 주인공은 페르시아의 왕 세르세. 거대한 제국을 거느리는 권력자이지만 오페라의 첫 장면에서 그가 찬미하는 것은 전쟁도 영광도 아닌 한 그루 나무의 그늘입니다.

가사는 놀라울 만큼 단순합니다. 그늘이 사랑스럽고 다정하며 더없이 부드럽다고 말할 뿐입니다. 설명도 서사도 없습니다. 헨델은 이 단순한 문장을 반복되는 선율 속에 길게 늘어뜨립니다. 음악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노래는 극 중 아리아를 넘어 하나의 사유가 됩니다. 힘을 가진 자가 멈추는 순간 비로소 그늘을 발견하게 된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곡은 원래 카스트라토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춘기 이전의 소프라노 음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를 훼손당했던 존재들. 천상의 음색 뒤에는 잔혹한 인간 희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그런 노래가 아닙니다. 그늘을 찬미하는 이 노래 자체가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햇볕을 견뎌온 목소리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실리아 바르톨리는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실려 있는 음반 [성스러운 희생](Sacrificium)의 의미는 성스러움이라는 이름으로 바쳐진 희생정도가 됩니다.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희생당한 카스트라토를 기리기 위한 독특한 프로젝트의 산물입니다. 여기서 바르톨리는 카스트라토를 그냥 흉내 내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의 메조소프라노로서 온전한 여성의 몸으로 그 자리에 섭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노래는 그냥 매끈하지 않습니다. 음 하나하나에 미세한 숨결과 체온이 남아 있습니다. 천상의 소리가 아니라 기억을 품은 인간의 소리를 내고 싶었나 봅니다. 노래는 위로를 설득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내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와이의 저 나무들처럼.

이 노래에 귀를 기울일 때면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누구의 그늘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이제 나는 누구를 위한 그늘이 될 수 있는가? 하와이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삶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딸을 위해? 아직도 박사학위라는 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들을 위해? 막 세상에 도착한 손주 레오를 위해? 혹은 묵묵히 곁을 지켜온 시인 벗들과 이제 막 자신의 길을 찾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

그늘이 된다는 것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버텨주는 일입니다. 빛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빛이 너무 강할 때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일입니다. 반얀트리는 스스로 그늘이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햇볕을 피하고 싶은 이들이 그 아래로 자연스레 모여듭니다.

바르톨리의 이 노래도 그렇습니다. 위로를 강요하지도 않고 감동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느리게 들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듣는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그 그늘로 찾아들도록.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주는 것입니다.



/이종민은 40여 년간 지켜온 대학 강단에서 물러나 고향 완주에서 인문학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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